지난해 12월 강원도 강릉 자동차 급발진 사고 당시 현장 모습. [사진=연합뉴스]
지난해 12월 강원도 강릉 자동차 급발진 사고 당시 현장 모습. [사진=연합뉴스]
김삼수 소비자주권시민회의 정책실장

자동차 급발진은 대형 사고로 이어질 정도로 위험도가 크고, 사망률도 높다. 지난 8년간(2015년~2022년) 한국교통안전공단에 접수된 급발진 의심 신고 건수만 316건에 이른다. 하지만 실제 제조사의 제작 결함으로 급발진이 발생했다고 인정된 경우는 단 한 건도 없다. 급발진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은 ‘운전자 과실’이 크다는 것이다. 운전자들은 사고도 억울한데, 책임까지 떠안아야 하는 상황이다.

문제는 운전자가 스스로 급발진 결함을 증명해야 하는 현행 법규와 제도에서 기인한다. 전문지식이 없는 일반 소비자들이 자동차 제조사들과 싸워 급발진을 인정받기란 쉽지 않다. 소비자주권시민회의를 비롯한 시민사회가 소비자가 아닌 제조사 입증책임으로 전환하라고 줄기차게 요구하는 이유다.

지난해 12월, 12살 손자가 사망하고, 60대 여성 운전자가 크게 다친 ‘강릉 티볼리 급발진 의심 사고’ 이후 국회에서는 급발진(결함원인) 입증책임 전환을 위한 ‘제조물 책임법’ 개정 논의가 시작될 예정이다. 당시 유가족들이 올린 급발진 입증책임 전환을 요구하는 국회 입법청원이 6일 만에 5만 명(국회입법논의기준)의 동의를 얻어낸 결과다. 임기가 채 1년도 남지 않은 21대 국회지만, 마지막까지 정략적 이해관계로 민생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제조사가 자사 차량에 문제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도록 ‘입증책임’을 전환하는 법 개정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입증책임 전환만큼 시급히 개선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또 있다. 자동차 충돌 전의 차량 속도, 충돌정보, 에어백의 전개정보 등 사고 원인의 핵심이 되는 15개의 항목이 저장된 EDR(Event Data Recorder)이라는 사고기록장치가 있다. 이런 중요한 자료를 보기 위해서는 ‘EDR 분석기’가 필요하다. 현재 우리나라는 H·K차 등 국내 차량 제조사만 분석기를 통해 EDR 정보를 볼 수 있다. 벤츠 BMW GM 폭스바겐 등 해외 자동차 기업 상당수는 해외 B사의 'EDR 분석기'를 사용하는데, 국내 H·K차 등은 국내 G사의 분석기를 사용하고 있어 시중에 판매되는 분석기로는 EDR 분석이 불가능한 것이 원인이다.

급발진 사고를 소비자가 입증해야 하는 현재 상황에서 원인을 규명해 줄 EDR조차 볼 수 없다면 소비자 피해는 커질 수밖에 없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향후 제조사 입증책임 전환이 이루어진다 해도 소비자가 관련 내용을 볼 수 없어 제조사의 논리에 끌려갈 수밖에 없다. EDR 기록의 신뢰성을 소비자들이 끊임없이 의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EDR 분석기를 누구나 사고, 누구나 분석할 수 있도록 해 소비자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시급하다.

H·K차는 EDR 분석장치 판매에 대한 국내 규정이 없고, 개인정보 문제 등으로 판매하지 않는다는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런 H·K차도 미국에서는 규정에 따라 EDR 분석기를 소비자에게 판매하는 것과 비교해도 매우 불합리하다.

미국은 연방법으로 자동차 회사가 신차를 내놓으면 90일 안에 EDR 분석기를 누구나 살 수 있도록 제조사에 강제하고 있다. 미국은 일반 소비자, 보험사, 사고분석기관, 병원 등도 누구나 쉽게 구매해 분석할 수 있다. 자동차 제조사 중 테슬라, 토요타 등은 기존 EDR 외에 추가 장치를 설치해 주행과 사고 기록을 저장하고 필요시 운전자에게 제공까지 하고 있다.

EDR 분석기 일반 판매가 이루어져야 차량 결함으로 인한 사고인지, 운전자의 실수로 인한 사고 인지 원인 규명이 명확해지는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다. 더불어 EDR 사고 저장시간을 늘리는 것도 필수다. 국내 차량은 사고가 나도 EDR에 저장되는 시간이 충돌 전 단 5초뿐이다. 미국 포드사 25초에 비해 5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충돌 전 기록된 5초의 시간만으로 사고 분석을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이마저도 H·K차는 정보를 0.5초에 한 번씩 기록하지만, 해외 업체 상당수는 0.1~0.2초에 한 번씩 정보를 저장한다. 최근 미국 정부는 자국 내 모든 차량의 사고 기록 저장시간을 20초 이상으로 늘리는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을 정도로 원인 규명에 철저하다.

H·K차는 급발진 예방과 원인 규명을 위해 조속히 EDR 분석기 일반판매, 사고 기록 저장시간 증가, 조향각 정보추가 등 EDR 데이터의 고도화에 나서야 한다. 소비자의 안전과 신뢰 확보를 위한 방안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소비자들은 급발진 사고가 늘어나자 ‘페달블랙박스’ 설치에 나서는 상황이다. 이제 더는 억울한 운전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 또 운전자들이 ‘불안’과 ‘공포’를 운전하도록 해서도 안 된다. 이제는 ‘안전’을 팔 때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소비자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