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더 글로리'는 학교폭력에 대한 현실의 답답함과 부조리함을 조명하고 이에 대한 복수로 시청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전후로 나왔던 여러 드라마들이 '복수'를 주제로 현실을 꼬집은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 많은 분노와 증오가 제대로 풀리고 있지 않다는 반증일 수 있다. [사진=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는 학교폭력에 대한 현실의 답답함과 부조리함을 조명하고 이에 대한 복수로 시청자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준다. 전후로 나왔던 여러 드라마들이 '복수'를 주제로 현실을 꼬집은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 많은 분노와 증오가 제대로 풀리고 있지 않다는 반증일 수 있다. [사진=넷플릭스]
최송목 CEO PI 전문가 
최송목 CEO PI 전문가 

“뭐라고요? 그놈 때문에 가족도 잃고 친구도 잃고 다 잃었는데 아무 벌도 안 받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공소시효가 사람보다 중요해요? 무슨 법이 이따위야?” ‘사적 복수 대행극’을 표방한 드라마 ‘모범택시’에서 20년간이나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 나온 ‘김철진’이 터트린 울분이다.

최근 죄를 지어도 제대로 죗값을 치르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을 다룬 TV드라마들이 열광적 인기로 얻고 있다. ‘모범택시’는 한때 순간 최고 시청률 18%를 기록하기도 했다. 복수 대행업체 사장은 명함에 ‘죽지 말고 복수하세요. 대신 해결해 드립니다’를 적어놓고 다닌다. ‘빈센조’ 역시 법의 테두리 안에서 단죄할 수 없는 재벌에게 마피아식 복수를 펼치는 인기 드라마다. 이외에도 ‘법쩐’·‘천 원짜리 변호사’·‘더 글로리’ 등 사실상 거의 모든 드라마가 복수극 중심이다. 우리 주변에 많은 생활 증오와 복수심리가 도사리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복수는 쉽고 용서는 어렵다.

이런 드라마가 열광적 인기를 얻고 있는 이면에는 현실적으로는 개인적인 복수가 법적으로 막혀있다는 데 있다. 그 꽉 막힌 스트레스와 울분을 극 중 영웅적인 복수로나마 핵사이다의 쾌감을 맛보려는 심리다. 상상이든 현실이든 복수한다는 것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용서(forgiveness)란 잘못을 범한 사람의 잘못을 사해 주는 행위, 더는 그가 잘못한 것 때문에 그 사람에 대해 분개하지 않고 보상을 요구할 모든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다.

용서에도 종류와 수준이 있다.

먼저, 공간의 차단과 시간의 흐름으로 인해 용서하는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용서다. 그 공간에서 멀어지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차츰 잊어가는 것이다. 용서라기보다는 사실상 눈의 기억과 감정의 기억이 무디어져 소멸되는 현상이다. 이 세상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보이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낡게 되고 결국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또한 순간의 증오심과 원망도 시간이 흐르면서 희석되고 잊힌다. 원망의 부피(量)는 시간에 반비례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승화된 용서다. 자기 아픔은 남의 것처럼 객관화시키고, 남의 아픔은 역지사지로 이해하고 배려하는 너그러운 용서다. 영어로 용서하다(forgive)에는 ‘죄를 제거하다’의 의미도 있다. 얼마 전 지인 친구 어머니가 88세로 새벽 운동 나가셨다가 택시에 변을 당했다. 하지만 그의 가족들은 택시운전사에게 더 이상 책임을 묻지 않고 수월하게 합의해 줬다. 사고를 낸 택시운전자가 33세 젊은 나이에 본의 아닌 사고로 평생 멍에를 지고 살아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불특정 청년의 장래를 위해 자기의 분노와 미움의 감정을 참아낸 것이다. 시간이 배제되고 승화된 이타적 경지의 용서다.

세 번째는 종교적 철학적 의미의 용서다. 성경에서 용서의 문자적 의미는 분한 마음을 ‘떠나가게 하는 것’이다. 해를 입은 것을 기억해 두지 않기 때문에 비이기적인 사랑으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너그럽게 봐주는 행위다. 자신이 입은 상처나 손실을 보상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으며,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지 않고 탕감해 주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 잘못을 묵인하는 것은 아니며 타당한 근거도 없이 너그럽게 봐주는 것은 아니다. 용서의 의미를 기억하고 용서로 얻는 유익을 생각하는 것이다. 화나고 분한 마음이 ‘떠나가게’ 하면, 평온해지고 건강이 좋아지며 더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죄를 용서받으려면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등가(等價)와 선행(先行)의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비즈니스에서 용서란 무엇일까? 평범한 일상 업무에서보다는 실패나 몰락과정에서 미운 사람이나 원망할 일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 원망의 감정에는 대부분 돈과 얽혀있다. 사업에서 대부분은 그러하다. 나 또한 사업 성공과 실패과정에서 줄 돈도 많았지만, 빌려주고 받아야 할 돈도 참 많았다. 이때 보통 사람들은 줄 돈보다 받을 돈이 훨씬 더 억울하고 기억도 또렷한 법이다. 나는 사업과정에서 빌려준 돈을 갚지 않고 고의로 버티는 그들이 괘씸하기도 하여 법적절차를 통해 악착같이 받을까도 생각했지만, 근근이 살아가는 그들 소식을 듣고는 마른걸레 쥐어짜는 기분이 들어 대부분은 포기했다. 솔직히 말하면 ‘용서’가 아니라 비자발적 ‘포기’에 가깝다. 내 마음 편하자고 그런 것도 일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과거의 돈과 기억과 소송에 매여 나의 현재와 미래를 방해받고 싶지 않은 방어적인 심리도 작용했다.

경영의 아버지라 불리는 피터 드러크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 중의 한 사람은 그의 할머니라고 한다. 그녀는 2개 층 임대를 준 치과의사와 심한 말다툼을 하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계속 그 치과에 치료하러 다녔다. 임대차 관계와 치료능력은 무관하다는 발상이다. 감정은 좋지 않지만, 좋은 조건이라면 거래는 계속하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실천으로 옮기기에는 그 감정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비즈니스와 감정’을 분리한 것이다.

비즈니스에서 용서는 감정과 사업의 분리다. 상대를 위한 배려와 본인의 필요에 의한 실리적인 유익을 동시에 염두에 두는 것이다. 원망과 분노의 기억으로 시간을 소모하면서 기회비용을 잃는 것보다는 미래 계획과 희망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실용적이라는 관점이다. 상처나 미움의 집착이 향후 사업의 발목을 잡거나 지배하지 않도록 배제하는 것이다. 미래를 위해 용서할 수 있다면 용서하고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과거 감정을 비즈니스와 분리하여 현재와 미래의 비즈니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번에는 사회·정치적인 측면에서 용서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해방 이후 한일 관계는 위안부 문제를 두고 끊임없이 외교공방이 오가고 있다. 한쪽은 용서를 다그치고 다른 한쪽은 미적미적 세월만 보내고 있다. 서로 자기 정부 상황과 세력들 눈치 살피는데만 몰두해 있다 보니 정작 당사자들 간의 용서는 본질에서 멀어져 가고 있다. 또 세월이 흘러 가해자와 피해자 당사자들은 죽거나 뒤로 빠지고 대리인 (정부, 기업 또는 후손)들의 손에 의해 당사자들의 의사와는 다른 방향으로 정치화되고 있다.

위안부 문제 등 국가 간 물리적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 즉 과거사 정리는 외교적 수사와 함께 결국은 돈으로 환산될 수밖에 없는 한계성과 향후 차기 정부의 번복 가능성 때문에 지금 어떠한 용서나 합의결과가 나오더라도 상호 불만족과 분쟁은 미래 지속적으로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거 우리 정부에 의한 한일 간 합의한 바 있는 사안에 대해서 그 타당성이나 합리성 합법성 여부를 떠나 최근 우리의 또 다른 정부가 이를 다시 번복하여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잠시 우리들 자신의 과오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과거 베트남 참전 때 수많은 민간인을 집단 학살하고 성폭행했던 사건에 대해서 우리가 일본에 요구하는 것처럼 베트남에 대하여도 통렬하게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고 있는지 말이다. 공식적으로 한국 정부는 20여 년간 “국방부 보유 자료에서는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관련 내용이 확인되지 않으며 베트남 당국과의 공동조사가 선행되어야 하나 그러한 여건이 조성되지 못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한국 정부는 또 한국군이 민간인을 살해했더라도 게릴라전으로 전개된 베트남전 특성상 정당행위이며 불법행위가 있었더라도 그 시점이 이미 수십 년 지나 시효가 만료됐다고도 주장한다.

여기에서 베트남 대신 일본으로 입장과 단어를 바꾼다면 우리 국민들 대다수는 납득할 수 없거나 분통을 터트릴 것이다. 사실은 우리가 일본에게 잘못과 사과를 원하는 것처럼 우리도 베트남에게 똑같이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는 마음으로 임해야 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하지만, 현실은 국가 간 득실과 여러 가지 정치사회적인 이유로 각각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인 경우를 많이 경험하게 된다. 사실 일본과 베트남문제의 피해자, 가해자는 시대도 다르고 당사자도 전혀 별개다. 다만, 시간이 지나 지금 해결사로 나서고 있는 양국 정부라는 주체는 같다. 이점에서 우리는 개인의 정의와 정체성과 마찬가지로 국가 또한 그에 걸맞은 정체성과 스텐스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용서받고 어떻게 용서할 것인가? 국가 간의 일은 개인과는 다른 논리와 정의가 적용되는 것인가? 우리가 베트남을 뭉개고 있듯이 일본 또한 그런 생각으로 우리를 뭉개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화해는 상호적인 것이지만, 용서는 일방적이다. 우리는 상호 관계개선을 위한 화해를 원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내 마음 편하자고 상대에게 일방적인 용서를 다그치고 있는 것인지를 짚어봐야 할 것이다.

용서는 과거에 엉킨 실타래를 현재에 끌어와 풀어가는 것이다. 과거 당사자와 현재 해결울 주도하는 주체자 감정의 밀도는 분명 다를 것이다. 이때 상호 간 진정한 감정의 주고받음이 없으면 그 엉킴은 영원히 풀리지 않을 것이다. 용서의 주체가 개인이던 국가던 미래를 바라보는 시선의 높이와 서로에 대한 마음이 중요하다.

미국 정신의학자 토머스 사즈(Thomas Szasz)는 용서를 이렇게 정리했다. ‘어리석은 자는 용서하지도 잊지도 않는다. 순진한 자는 용서하고 잊는다. 현명한 자는 용서하나 잊지는 않는다’ 이 중 우리는 어디쯤 해당할까? 그리고 용서를 통하여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의 미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 걸까?

글: 최송목 CEO전략전문 컨설턴트/ ‘사장으로 견딘다는 것’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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