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송목 CEO PI 전문가

요즈음 대통령이 격노한다는 뉴스를 자주 접한다. 현직도 격노하고 전직도 격노하고 당대표 등도 격노한다는 보도가 심심찮게 들리고 있다. 한마디로 권력자들의 ‘격노’ 대유행이다

‘격노하다’라는 것은 화난 감정에 권력이 더해진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예컨대, ‘노예가 격노하다, 군대 졸병이 격노하다. 비렁뱅이가 격노하다, 말단 직원이 격노하다’ 등의 말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반대로 위 보도와 같이 ‘왕이 격노하다. 대통령이 격노하다, 사장, 회장이 격노하다. 장관이 격노하다...’는 많이 들어봤다. 이외에도 힘센 권력자, 좀 이름 값한다는 인물들 모두에게 잘 어울리는 말이 될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격노하다’는 분명 갑의 언어임에 틀림없다. 쉽게 말해 힘을 가진 자, 권력자를 대변하는 언어다.

격노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 ‘몹시 분하고 노여운 감정이 북받쳐 오르다’이다. 그런데 우리는 같은 단어라도 화내는 사람 주체에 따라 다가오는 의미가달라진다.

격노는 갑의 감정에 힘이 더해진 것이다. 일반인이라면 그냥 ‘화’가 나는 것이다. 그래서 그게 도를 더하면 거품을 물고 넘어가거나 속으로 삭이게 되면 ‘울화’가 되어 화병이 난다. 하지만, 권력자가 감정이 흔들리면 ‘격노’하게 되고, 그의 영향력 하에 있는 을들은 피곤하거나 힘들거나 간혹 생명까지도 위협을 받는다.

역사적으로 왕이나 보스가 격노하여 죽은 신하나 부하가 여럿 있었다. 반대로 을이 화나면 울화로 발전했다가 그냥 안되면 병이 되어 앓아눕거나 등 제풀에 나가떨어진다. 이것이 화의 주체에 따른 경과의 차이, 그리고 영향력이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이 모든 표현이 본인들 스스로부터가 아니라 이를 바라보는 기자들의 눈과 입을 통해서 보도되었다는 사실이다. 관찰자의 눈과 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우리 사회 전반의 시대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이런 언어를 대수롭지 않게 흘리는 노출은 지금 우리 사회의 정신적 평등에 대한 인식을 알 수 있는 간접적 바로미터다. 그 시대 언어는 그 시대 정신이다.

언론들의 이런 언어 표현을 독자들이 필터링 없이 너무 쉽게 일방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이 사회는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시대 상황이 흐를 수도 있다고 본다. 일종의 가스 라이팅 되어 가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만약 이런 말이 거슬리지 않거나 거부감이 없이 받아들여진다면, 아직 우리 사회 기조가 과거 왕권시대 독재 권위 시대에 머물고 있거나 언론이 미처 이런 시대 흐름을 따르고 있지 못하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갑들의 화, 격노를 듣고 있는 국민들, 을의 기분은 어떨까? TV 뉴스에 나오니 어쩔 수 없이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그분들이 우리의 격노(이때는 화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를 들을 기회는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 일반인은 아무리 화를 내도 기자들이 관심도 알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격노는 노화의 언어다. 젊음의 언어가 아니다. 늙어가면서 간 기능의 약화 내지는 노후화로 일어나는 현상의 하나다. 간이 나빠지면 쉽게 화내고 참지 못하고 짜증을 잘 내는 현상이 일어난다. 젊은이는 화나도 스스로 삭이거나 타자에게 전달력도 약하다. 주로 자기 정화의 일종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나이 든 사람, 권력자의 화는 누군가에게 물리적 피해를 끼친다.

그러므로 사장, 회장,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지도자쯤 되는 분들, 집안 어른들은 함부로 격노하거나 그런 감정 노출의 사실이 외부로 알려지는 것을 가능하다면 자제해야 한다. 과거에는 대개 이런 일이 있어도 쉬쉬하거나 음소거 방식으로 처리되어왔는데 어찌 된 셈인지 요즈음은 많이 달라졌다. 대놓고 화내고 공개하고 있다.

오히려 은근슬쩍 알리는 수단 내지는 갑질의 한 형태로 의도적으로 보일 때도 있다. 우리 일반인이 보기에도 민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일개 초등생 수준의 감정 표현으로 만인의 관심을 받는 인물들이 스스로 체통을 잃고 있는 모습이다. 사전에 격노의 또 다른 뜻풀이에는 ‘어린아이와 미성숙한 어른에게서 발달 장애나 좌절감의 결과로써 생기는 감정의 폭발 또는 폭력 행위’로 나와 있는데, 딱 그 모습이다.

지도자, 갑의 최대 상징이자 위엄은 자제력에 있다. 자제력을 근간으로 권위가 서는 것이다. 웬만한 풍파에도 흔들림 없는 감정의 깊이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 위엄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최대한 억제하고 표현을 억눌러야 하는데, 걸핏하면 격노하는 기사를 신문지상에서 접해야 하는 우리 서민, 을들의 가슴은 매번 조마조마하다 못해 피곤할 지경이다. 안 그래도 펜데믹이다 불황이다 하여 일상이 피곤하고 힘든데 높은 분들 격노 감정까지 살펴야 하니 설상가상이다. 그러니 갑들은 부디 함부로 격노하지 마시라. 그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보고 듣는 을들은 힘들고 짜증 난다.

본인이 갑인지 을인지 모르겠다고?

필자가 생각하는 갑과 을의 기준은 이렇다. 자기가 화냈는데 신문기사나 방송에 바로 나오면 본인이 지금 갑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하지만, 옆에 있는 사람조차도 아무런 반응 없으면 완벽한 을이다.

글: 최송목 《사장으로 견딘다는 것》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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