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송목 CEO PI 전문가는 최근 출시되는 샴푸와 린스에 대해 노년층에게 친화적인 ‘Silver Friendly’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진=최송목 CEO PI 전문가]
최송목 CEO PI 전문가는 최근 출시되는 샴푸와 린스에 대해 노년층에게 친화적인 ‘Silver Friendly’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사진=최송목 CEO PI 전문가]
최송목 CEO PI 전문가 
최송목 CEO PI 전문가 

오래전 은행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할 때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용어가 하나 있다. ‘User Friendly’라는 말이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사용자가 편하고 친근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사용자 친화적’으로 프로그래밍 하라는 뜻이다.

예컨대, 고객이 글자 하나를 잘못 입력하면 ‘영문자로 입력하세요’라던가, ‘전화번호 입력은 필수입니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커서를 해당란으로 이동하여 깜빡이를 켜주는 식이다. 메인 알고리즘과는 별개로 이런 에러 메시지는 ‘경우의 수’가 많고 잔손질이 많이 가는 작업이라 프로그래머 입장에서는 귀찮기도 하고, 한마디로 대세에 지장이 없어 애써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개는 사수가 메인 알고리즘을 짜서 넘기면 보조 프로그래머가 뒤치다꺼리 일로 다루었던 기억이 난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이 말이 불현듯 소환된 곳은 전혀 엉뚱한 곳이다. 바로 우리 집 샤워실이다. 머리 감으려고 샴푸를 찾다 보니 샴푸와 린스를 구분할 수 없어 ‘이건가 저건가?’ 헤매다 낭패를 본 것이다. 깨알 같은 글씨, 국산품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은 영어로 써놓다 보니 무슨 의미인지 도무지 알 수도 없다.

간신히 물젖은 채로 실눈을 뜨고 읽어봤더니 글자는 겨우 읽을 수가 있는데, 이번에는 내가 그토록 찾는 ‘샴푸’·‘린스’라는 글자가 보이지 않는다. 엉뚱하게 어려운 말만 잔뜩 나열되어 있다. 인내심을 가지고 간신히 찾아낸 글자 ‘샴푸‘나 ’ 린스‘는 정작 있어야 할 중앙 자리에 없고 구석으로 밀려나 깨알만 하게 숨겨져 있다. ‘나 좀 찾아주세요’ 하는 것 같다.

내가 사용하는 특정 제품만 그런가 싶었더니 다른 제품도 닥터 케어·더마설루션·에코니처·대미지리페어링·오가니스트·컨디셔너·트리트먼트·대미지케어 등 무슨 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외래어만 가득하다. ‘샴푸’나 ‘린스’ 글자가 없는 경우도 있고, 있어도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위치에 있거나 작은 글씨다. 은유법인가? 동문서답인가? 나의 시력을 테스트하는 건가? 이제는 머리 감는 것도 영어실력이 어느 정도 되어야만 가능한 세상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매일 쓰는 생활용품 중 샴푸와 린스만큼 주의를 요하는 물건도 없는 듯하다. 그리고 이 두 가지만큼 소비자와 공급자의 눈이 극단적으로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는 경우도 드물지 않나 싶다. 특히 같은 회사 제품에서는 샴푸와 린스가 쌍둥이처럼 디자인되어 있어 구별이 거의 불가능하다.

여기에는 중소기업·대기업 제품 모두 같다. 1930년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샴푸와 1940년대 개발된 린스가 생활필수품으로 자리 잡은 지도 꽤 되었다. 80여 년의 긴 역사다. 샴푸 린스 사용 이후 그동안 우리 인간은 컴퓨터를 발명했고, 달나라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고, 스마트폰으로 생활이 한껏 풍요로워졌지만, 머리 감을 때만큼은 80년이나 불편이 지속되어 왔고 현재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회사 입장에서야 자사의 좋은 샴푸·린스를 설명하기 위해 보다 많은 설명과 외국 제품처럼 보이기 위한 영어 표기가 필요할 테지만, 쓰는 소비자는 사용할 때마다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나만 유독 까다로워서 그런가 싶어 주변 시랍들에게 물어봤더니 대부분 나와 같은 생활 짜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특히 나이 들어 시력이 나빠진 중노년층은 거의 대부분 불편하다는 반응이다. 클렌징 폼을 샴푸로 알고 잘못 사용하거나, 둘을 반대로 사용하거나 등 착오로 사용하는 사례는 차고도 넘친다.

이런 불편이 최고조로 달하는 것은 집이 아닌 여행지 숙소에서다. 혹여나 객지에서 실수하지 않을까 노심초사 실눈 뜨서 읽어보고, 뚜껑도 열어보고, 냄새도 맡아보고, 점성도 비교해 보는 버릇이 생겼다.

집에서 이런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나름 좋은 해결책을 내놨다. 별도로 큰 글씨로 라벨을 부착하여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말하자면 셀프 ‘User Friendly’다. 제조회사에서 열심히 깨알 같은 글씨로 한 면 잔뜩 나열해 놓은 ‘자기들만의 설명과 홍보글’은 무시하고 그냥 그 위에 커다랗게 ‘샴푸’ 또는 ‘린스’로 나만의 표기를 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샴푸·린스 겸용을 구매해 쓰기도 한다.

지금 시대는 친절 과잉의 ‘친절 범람’의 시대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우리는 움직이는 동선 곳곳에서 과도한 친절을 경험하고 있다. 백화점과 은행은 물론, 동네 가게에서 조차도 온갖 과분한 친절에 둘러싸여 있다. ‘고객은 왕’이라고 치켜세우기도 하고, 자식에게도 못 받는 90도 배꼽인사도 흔하게 받곤 한다. 이렇듯 친절의 끝판왕을 맛보고 있는 시대에 오직 샴푸와 린스만이 자기만의 아집과 불통으로 자기 할 말만 하고, 자기 보여 줄 것만 보여주고 자기 갈 길만 가는 것 같아 아쉬움이 많다.

바야흐로 ‘부모·나·자식·손자’ 이렇게 4세대가 살아가는 4G 시대다. 시력 밝은 청소년과 MZ세대에 대한 관심도 좋지만, 4G의 일원인 노년층에 대한 이해도 결코 가볍지 않다 할 것이다. 점차 눈이 침침해지는 실버 세대에 대한 소비행태와 니즈에 대해서도 제조사의 따뜻한 시선이 필요해 보인다. ‘User Friendly’에서 좀 더 확장된 친절한 샴푸, 멀리서도 크게 눈에 띄는 린스의 ‘Silver Friendly’를 기대해 본다.

최송목 CEO PI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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