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관계나 에티켓을 말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단어 중 하나가 '겸손'이다. 비슷한 말로 '겸허'가 있다.  이 두 단어는 미묘한  어감의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생활에서는 별 구분 없이 혼용되고 있다. 몸을 낮추어 허리 깊이 숙여 배꼽 인사하고 ‘겸손’한 태도를 취한다거나, 고배를 마시거나 아쉬운 일이 생겼을 때 실수를 ‘겸허’히 받아들인다는 표현 차이 정도다. 

먼저 두 단어의 사전적 의미부터 살펴보자. 겸손(謙遜)은 ‘남을 존중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태도가 있음.’이다. 겸허(謙虛)는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태도가 있음.’으로 되어있다. 사전의 뜻풀이만 봐서는 비슷비슷하여 구분이 모호하고 뜻풀이가 오히려 더 어렵게 느껴진다. 영영사전에서도 ‘humility’와 ‘modesty’는 구분하여 쓴다기보다는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겸손은 ‘태도’의 의미가 강한 humility에, 겸허는 ‘스스로’에 방점을 두는 modesty에 좀 더 가깝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두 단어 사이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먼저 겸허에는 불명예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한 내부로부터의 도덕적 거부감이 포함되어 있는 반면, 겸손에는 도덕적 거부감이 거의 혹은 전혀 포함되어있지 않다. 즉, 겸허에는 양심이 작동하지만, 겸손은 선한 마음 없이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뜻이다.

한자 겸허에서 ‘虛’(허)는 스스로 비운다는 의미로 자기 수양에 좀 더 근접한 단어다. 여기서 ‘비운다’는 것은 최종적으로는 자기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래야 상대를 완벽하게 존중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겸허와 겸손은 일체를 이룬다. 이때 겸허한 마음은 겸손을 통해서 완벽히 상대에게  진정성이  전달될 수 있을 것이다.

겸손과 겸허의 가장 큰 차이점은 대상이 다르다는 것이다.

겸손은 겸손해야 될 대상이 타인이지만, 겸허는 본인 자신이다. 겸손은 타인에 대한 태도이므로 인위적 가식적으로도 가능하지만, 겸허는 자기 통제하에 스스로 바라보며 낮추고 비우는 마음으로 포장이 어렵다. 겸손은 타인의 눈높이에 맞추는 객관적 기준의 기능에 가깝고, 겸허는 주관적 가치의 기준이므로 스스로에게 솔직함이 요구되는 성찰에  가깝다. 겸손은 눈으로 보이는 것이므로 강제할 수 있으며 통제가 가능하지만, 겸허는 보이지 않는  무형으로 강제하기도 통제도 어렵다.

겸손은 대상의 힘을 의식하는 태도지만, 겸허는 상대 힘의 강약에 크게 상관없이 본인 스스로의 근원적 인간의 불완전성과 능력의 한계성을 인식하고 성찰하는 마음이다. 겸손이 외적으로 꾸미는 태도라면, 겸허는 스스로 내면을 살피고 비우고  지우려는 보이지 않는 노력의 마음이다. 겸손의 본질은 외면적 태도지만, 겸허의 본질은 자기 객관화와 끊임없는 자기 탐구다. 겸손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과 주체는 상대방 외부지만, 겸허는 본인 스스로가 내부기준을 정하여 행하고 결과를 판단하는 심판이고 주체다.

겸손은 강자의 언어다. 특히 성공한 사람에게는 필수 미덕이다. 따라서, 약자에게 겸손이라는 말은 사치일 수 있다. 힘 있는 자, 강자가 자신을 낮추어 약자와 눈높이를 같이 하는 것이 겸손이다. 강자가 자신을 더 높이거나 높은 위치 상태에서 상대를 대하면 ‘교만’이라 하고, 반대로 약자가 자기를  인위적으로  자기를 높이면 ‘허풍’이 되고 낮추면 ‘비굴’이  된다.

그러므로 겸손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일반적 용어가 아니다. 강하고, 똑똑하고, 권력 있고 능력 있는 자들에게 부여된 언어다. 예컨대, 국회의원, 사장, 회장, 권력자, 지도자들에게는 겸손이 필요한 덕목이지만, 말단 직원, 일반서민에게는 조심스러운 단어다. 적어도 힘(완력, 지식, 권력, 능력 등)의 시각으로만 봤을 때 그렇다. 한마디로 ‘겸손’은 충분히 성공하고 높이 올라가 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이고 미덕이다.  

겸손은 자기의 필요성이나 상황의 유불리에 따라 선택하거나 강제될 수도 있다. 돈, 권위, 지위, 관습, 분위기, 여론 등이다. 흔히 정치인들이 TV인터뷰나 공식석상에서 90도 인사하고 사과하고 낮추는 태도 등 마음에도 없는 공손함 대부분은 겸손에 해당한다. 그들의 언어에서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겸손만 있고 겸허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겸손이 세상사람 모두의 미덕인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예절, 에티켓과 밀접한 연결성 때문일 것이다. 돈 많은 재력가, 정치권력자가 허리를 굽히면 겸손하다고 칭송하지만, 말단직원이 허리를 굽히면 당연한 처신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다수의 일반인을 대상으로 비즈니스 하는 이들에게 겸손은 훌륭한 처세 도구로도 활용되고 있다. 겸허(마음)가 없는 겸손(태도)만으로도 충분히 인간관계의 상당 부분을 커버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우리들의 인간관계 대부분은 겸손이라는 보이지 않는 자기장의 프레임 속에서 작동되고 있다. 반면, 겸허는 자기 수양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는 평생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는 개념이다. 겸손은 외부 타인을 지향하지만 겸허는 내부 자신을 지향하고 있어 바라보는 영역이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걸핏하면 사과하고 겸손을 밥 먹듯 생활화하면서도 자기반성과 언행일치가 전혀 되지 않는 일부 정치인들이 그렇다. 그들 머릿속에는 겸허라는 개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밖으로 내다보는 눈만 있을 뿐, 내부를 들여다보는 눈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지난 2022년 전국 대학 교수들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가 ‘과이불개(過而不改)’다. 과이불개는 ‘잘못을 해도 고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매일 아침 뉴스마다 도배되고 있는 정치 지도자들의 허리꺾기와 반복되는 포장된 겸손은 국민들의 손사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겸손은 순간의 용기에 의한 겉치레지만, 겸허는 깊은 자기반성과 성찰이 요구된다. 잘못이 있을 때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지도자가 몸과 마음으로 ‘내 탓, 내 잘못’이라고 용기 있게 말하는 것이다. 이제 그 넘쳐나는 거짓 겸손은 그만하고, 진심이 담긴 겸허를 조금이라도 곁들여주면 좋겠다. 독재, 문민시대 등을 지나는 동안 설익은 정치와 거짓말을 지난하게 견뎌 온 우리 국민들에게 이제는 겸허를 보여줄 때도 되지 않았나 감히 기대해 본다.

글: 《사장으로 견딘다는 것》 저자/ CEO 전략 어드바이저 최송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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