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다른 모든 동물들보다 우위에서 이 땅을 지배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문자 때문일 것이다. 기원전 3000년경 인류 최초의 문자인 메소포타미아의 쐐기문자(cuneiform)로부터 지금까지 약 5천 년 동안 인간은 언어와 문자를 통해 후대인들과 소통하고 지적 유산을 축적하고 발전시켜왔다. 하지만, 그런 훌륭한 수단이 있었음에도 성찰의 진보는 과거 수천 년 전 보다 더 이루어진 게 별로 없어 보인다. 기술은 최신 업데이트된 걸 배우는데, 철학이나 가르침은 옛날 그대로다. 아직도 우리는 1000년, 2000년 전 위인들의 말과 글을 고전 삼아 머리를 싸매고 있다는 게 그 증거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 인간은 이렇게 채바퀴 돌듯 과거를 반복하기만 하고 영적인 진전이 더딜까?

인간의 문명은 기록의 누적으로 공동 유산화되어 전수 발전되어 왔지만, 평생 애써 일구어낸 개인의 통찰은 죽음으로 리셋돼 늘 0부터 시작하기를 반복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각 개인은 과거 기록의 축적을 통해 뭔가 깨달음의 진전을 이뤄보려 노력하지만, 조상의 과거 철학을 이해하려다 세월 다 보내고 그러다 죽음에 이른다. 축적의 논리 그대로라면 아버지가 60세에 깨달은 것을 나는 20세쯤 깨달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버지가 60세에 깨달은 것을 우리도 늘 ‘그때쯤’ 깨닫게 된다. 문자라는 도구의 발명으로 기록은 영구적 공동 축적이 되어 왔지만, 인간은 죽음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당대의 개인 축적에 그치는 단발성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시대가 바뀌어 컴퓨터의 도움으로 축적의 한계는 많이 해소되었고 향후 인공지능이 더욱더 진화 발전될 것으로 전망하지만, 이 같은 근본적 한계는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한계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한 인생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일까? 세상은 지극히 느리지만 천천히 진실을 향해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들 대부분은 천성적으로 선한 행복을 추구하며 매일 조금씩 행복해지려 노력하고 있다. 아마도 양심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관점과 표현에 따라서는 집단지성, 우주지성, 성령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약 2천 년 전 로마 네로 시대 철학자 세네카는 “인생은 짧은 이야기와 같다. 중요한 것은 그 길이가 아니라 가치다.”라고 말했다. 좋은 가치를 추구하며 살라는 것이다. 좋다는 것은 선(善)한 방향으로서의 개인적 가치에서 출발한다.

사람들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개인의 가치에서 타인에게 그 선함을 전달하려는 선한 영향력 행사의 욕구에 이른다. 일반적으로 좋은 가치를 추구하고 공유하려는 것은 선(善)한 방향으로서의 가치 확장으로 보편적인 행복감을 확산하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공유과정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맞닥뜨리게 될 하나의 문제가 있다. 확장하려는 나의 힘과 타인의 정체성 간의 충돌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좋은 가치 추구 즉, ‘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과정에는 반드시 타인의 가치가 자리한다. 여기에서 영향력의 력(力)은 어떤 힘이고 의지가 작용하고 있음을 내포한다. 그 힘은 강약과 변화가 불가피하며 다른 힘이나 가치와의 충돌을 예고한다. 그리고 우리가 확고하게 만고불변이라 생각하는 그 善이 항상 온전한 善으로 유지될지 언제 흔들릴지 그 미래를 담보할 수도 없다. 또 그 선하다는 기준은 무엇이며 누가 그 선함을 결정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모호하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확신하는 선도 어쩌면 나만의 착각이거나 취향이거나 나의 손익일 수도 있다. 또 우리는 가끔 선악을 호불호와 혼동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가 불결한 옷을 입고 그의 몸에서 악취가 난다 해서 그를 악이라 한다거나, 그녀가 화려한 옷에 환하게 미소 짓는다 해서 그녀를 선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내가 추구하고 있는 선이 타인의 가치와 마주할 때는 잠시 멈춰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 고유한 가치와 善이 있듯 상대방 또한 복잡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삶의 주체로서 자기 가치에 대해 고민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는 내가 가는 길에 어쩌다 부딪힌 돌부리가 아니다. 그는 아마도 나와 합의되지 않은 善을 가지고 나름의 길을 가고 있는 존재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나름 자기 갈 길을 가고 있는 고귀한 존재다. 그러므로 내가 좋으면 타인도 좋을 것이라는 환상으로 나의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 경험 등의 권위로 나의 확신을 타인에게 강제하려는 ‘선한 영향력’은 때로 그것은 ‘선한 폭력’으로 변질될 가능성도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또 하나의 가능성 ‘그랜드 스탠딩(grandstanding)’이 있다. 미국 텍사스 테크 대학의 철학과 교수인 저스틴 토시가 그의 책《그랜드 스탠딩》에서 언급한 것으로 ‘남들의 관심을 얻고, 자기 과시를 하는 행위’를 뜻하는 말이다. 최근 SNS 시대의 인정 욕구에 편승하여 일어나고 있는 일종의 도덕적 관종이거나 자기 우월의 환상 또는 허세적 도덕주의에서 비롯된 미덕 과시 현상이다. 선한 영향력도 이 같은 과시의 우려를 배재할 수 없다. 정의라는 이름의 도덕적 단죄가 있을 수 있듯이, 선함의 과시로 인해 진정성이 결여된 선함의 버블이나 그럴 능력 없는 이들에게까지 불편한 사회적 부담이나 죄의식이 생성될 우려다.

물론, 이런 염려에도 불구하고 그런 선한 의도를 과소평가하거나 실용적 측면에서 무용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다들 ‘나는 선하다’, 좋은 일 하고 있다 ‘라고 표방하는 걸 곧이곧대로, 선하게 말하거나 그렇게 보인다고 해서 선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살피라는 것이다. 거기에는 교만이나 위선, 이기심, 이념의 불순물이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선하다는 것은 사회적 합의나 동의로 도출된 윤리와는 다르게 주로 개인의 주관적 신념을 기준으로 형성됨으로써, 그것이 보편적, 절대적 개념으로 타인에게 적용되고 공용화하는 데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직장이나 교육과정에서 합의되지 않은 누군가의 신념이 선의라는 이름에 포장되거나 밥줄이나 권력으로 자연스럽게 강요되는 행위가 당연한 듯 생활화되어 온 것도 이 같은 맥락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사업가가 돈을 수단으로 좋은 일을 하려는 경우, 제공자와 수용자 간의 소통의 미스매치가 발생할 소지나 그것이 하나의 이념으로 작용할 때 개인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자선 자본주의(Philanthrocapitalism)에 빠질 우려도 있다. 이것은 특정 개인이 막대한 부를 이용해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함으로써 자신의 의사를 공공화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하냐라는 문제점 제기다. 물론, 우리는 아직도 선한 기업의 선한 지원에 목말라하고 있고, 전 세계 기아인구가 8억 1천만 명에 달하고 있는 상황에서 배부른 논란 또는 때 이른 문제 제기의 소지는 있을 것이다. ‘사람이 굶어 죽어가는 마당에 밥의 정당성이나 도덕의 품질을 따지는 게 과연 유용한 것이가?’라는 점이다. 하지만, 분명 한 번쯤 짚고 거쳐야 할 주제인 것 같다.

기업은 극단적으로 사악해져서도 이기적으로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완벽하게 종교단체처럼 선을 추구할 수도 없다. 따라서 회사의 경영방향을 선하게 설정하고 선한 의사결정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려는 의도와 태도는 좋은 일이지만, 선한 영향력 행사에는 기업 리더의 총체적인 통찰 능력과 지혜가 필요하다. 선한 영향력은 완전무결의 절대 선이 될 수 없으며, 통제할 수 없는 절대 권력이 되어서도 안된다. 그 또한 하나의 힘이고 동기와 무관하게 그 과정에는 많은 잡 요소가 개입되어 그 결과가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다. 윤리와 선은 구분되어야 하고, 선과 악은 때로는 극단의 대척점이 아니라, 동반자로서 구분이 모호하게 뒤범벅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선하라는 건가, 선하지 말라는 건가? 善하라는 것이다. 다만, 자기가 확신하는 그 선함이 참인지 페이크인지 척인지 이용당하고 있는 건지 등 善의 색깔과 품질을 돌아보고 그걸 넘어서라는 것이다.

글: 《사장으로 견딘다는 것》 저자/ CEO 전략 어드바이저 최송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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