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경제신문 이승리 기자]  영화 세렌디피티는 ‘운명’ 그 자체다. 주인공인 두 남녀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운명’을 담보로 ‘뜻밖의 행운’을 시험한다.

매개는 이름과 연락처를 적은 ‘5달러 지폐’다. 결국 둘은 7년 만에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이 로맨틱하기 그지 없는 이 결말은 영화 속에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현실판 세렌디피티는 ‘-483억원’이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9년 상반기 손상화폐의 액면 금액은 총 2조2724억원’으로, 다시 발행하려면 무려 483억원이 필요했다.

화재 등의 사고를 제외하면 잘못 보관하거나 취급상 부주의 등 가벼운 사연이 화폐 손상의 이유인 것을 감안하면 혹독한 대가다. 483억원은 무심코 저지른 지폐 훼손에 대한 톡톡한 기회비용인 셈이다.

우리는 설이나 추석을 앞두고 ‘새 돈’을 준비한다. 빳빳하고 깨끗한 돈을 덕담과 함께 건네기 위해 은행에 간다. 카카오톡으로도 돈을 보낼 수 있고, 계좌만 알면 이체를 해줄 수 있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번호표를 뽑고 순서가 올 때까지 기다린다.

직접 수고로운 행동을 마지않는 것은 바로 새 돈 향기를 물씬 뿜어내는 '그것'이 네 손에 닿을 때쯤 조금이라도 내 진심이 더해질까 하는 마음에서다.

그래서일까? 지갑 속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는 돈은 으레 손때가 덜 탄 깨끗한 것이 되곤 한다. 누구의 손을 거쳤는지 알 수 없지만 내게는 오래 머물러 주었으면 싶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돈이 싫을 수 있겠냐만은 ‘OO아 사랑해’가 씌여진 너덜너덜한 지폐는 애정까지 까맣게 타버린 것 아닐까 싶어 굳이 지갑 가장 앞에 두고 먼저 쓴다.

사랑하지만, 그 너머의 운명 역시 내 편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적어 넣은 지폐 속 ‘메모’는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남겨두자. 당사자에게는 사랑이자, 운명이겠지만 타인에게는 낙서로 얼룩지고 찟어진 돈은 슬그머니 귀퉁이로 잡고 들어올릴 수밖에 없는 ‘악연’이다. 현실에서 운명을 테스트해 보려거든 지폐 대신 휴대전화 ‘연락처’ 메뉴를 터치하자.

‘저기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연락처 좀 주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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