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반도체 1위 대한민국, 소재 공급 막히면 일본도 손해
현지 여론도 아베에 부정적...“정치 문제로 경제에 악영향”
반도체 산업 경쟁력 향상 위한 장기 안목과 투자 필요한 시점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가 일본발 도전에 직면했다. 사진은 지난 3월 이낙연 총리가 SK하이닉스 중국 충칭 공장 방문 당시 모습 (사진=연합뉴스)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가 일본발 도전에 직면했다. 사진은 지난 3월 이낙연 총리 SK하이닉스 중국 충칭 공장 방문 당시 모습 (사진=연합뉴스)

 

[소비자경제신문 이한 기자]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수출 규제로 인한 손해와 악영향이 결국 일본 기업으로 향한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한국 기업이 당장은 혼란을 겪겠지만, 국내 산업계가 위기를 기회로 삼아 도약의 원동력으로 삼자는 목소리가 높다.

국내 전자업계 한 관계자는 4일 기자와 만나 “한국이 반도체 소재 수급에 어려움을 겪어 경제적 타격이 생긴다면, 일본 역시 재료를 공급하지 못해 큰 손해를 볼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이 한국 산업의 중요한 지점을 노려 수위 높은 공격을 가한 것은 사실인데, 그 조치가 현실화하면 한국만 피해를 보는 게 아니라 결국 일본도 위험하다는 의미다. 이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기업이 거래를 중단해서 협력사가 어려워진다는 얘기는 있어도, 부품 업체가 공급을 중단해 대기업이 흔들린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 없다. 물론 한·일 관계에서 일본을 중소기업이나 일개 부품 업체에 비유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반도체 1위 국가다. 질 좋은 소재가 많이 필요한 건 사실인데, 국내 기업에게 소재를 팔지 못하면 결국 일본도 가장 큰 거래선을 잃는다.”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 박재근 회장(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도 같은 견해를 밝혔다. 박 회장은 <소비자경제>와의 통화에서 "작년부터 수출 규제에 대한 소문이 있었으나 일본이 실제 행동에 나서지는 않을 것으로 봤다. 왜냐하면 수출길을 막으면 결국 일본 기업이 직접적인 타격을 받기 때문"이라며 "일본이 무리수를 뒀다"고 언급했다.

◇ 한국 향한 복수?데미지는 일본 포함 전 세계로

박 회장은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관련 소재는 첨단 정밀 제품으로, 생산량을 일부 조절할 수는 있으나 갑자기 공장을 멈출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수출량이 줄어도 기본적으로 생산하던 물량 만큼 꾸준히, 적어도 평소와 비슷한 수준으로는 계속 생산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결국 소재를 한국에 수출하지 못하면 해당 제품이 전부 재고로 쌓여 큰 부담이 된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박 회장은 '이번 조치를 전체적으로 어떻게 보느냐'는 질문에 “자유무역 체제를 흔든 조치일 뿐 아니라, 결국 일본 반도체 소재 회사나 장비 업체에 경제적인 손해를 입힐 자충수”라고 답했다.

재고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 재료’와 ‘한국 완제품’ 두 기업만의 이슈가 아니라 이해관계가 얽힌 기업이 많기 때문이다. 반도체 산업은 생산자와 구매자 둘만 존재하는 단편적인 시장이 아니다. 예를 들어 삼성이 재료를 공급 받아 반도체를 만들면 글로벌 IT 기업이 그 반도체를 구매해 부품으로 쓴다. 소니가 만드는 노트북이나 파나소닉이 만드는 제품에도 삼성 반도체가 들어간다.

일본 기업만 쓰는 것도 아니다. 화웨이 스마트폰은 물론이고, 심지어 애플 아이폰도 삼성 반도체가 필요하다. 일본의 조치로 반도체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 전 세계 글로벌 IT 기업이 줄줄이 피해를 본다. 애플이나 화웨이 등 유명 글로벌 기업들이 일제히 일본 정부의 조치를 예민하게 받아들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실제로 일본이 발표한 수출 규제에 대해 글로벌 신용평가기관과 해외 언론도 관련 문제를 지적했다. 무디스는 일본 경제 보복이 “세계 공급 체인은 물론이고 기술·전자업계에 심각한 영향을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자유무역 신봉자를 자처하던 아베 총리가 트럼프식 통상전술을 따라한다”며 비판에 나섰다.

◇일본 내에서도 부정적인 여론 들끓기 시작

일본 현지 언론도 부정적인 입장을 다수 내놨다. ‘한국 반도체 기업이 재료 공급처를 다양화하거나 한국 기업으로 대체하면 결국 일본 소재 기업이 어려워진다’는 시선이다. 현지 기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도 제기했다. 앞서 기사 서두에서 언급한 견해와 궤를 같이 한다.

아사히신문은 지난 3일 ‘대(對) 한국 수출 규제 보복을 즉각 철회하라’라는 사설에서 일본 정부 수출 규제가 “정치적 목적에 무역을 사용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 신문은 “최근 미국이 중국을 향해 내세운 어리석음에 일본도 참가했다”고 지적하면서 “자유무역의 원칙을 왜곡하는 조치는 즉시 철회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도쿄신문도 ‘서로 불행해질 것’이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신문은 사설에서 “일본의 조치가 일본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대화 실마리를 찾아 조기 수습을 시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한국 기업의 '탈(脫)일본'이 진행되는 역효과가 생길 것”이라고 우려했다.

평소 ‘우클릭’ 성향이 강한 것으로 알려진 산케이신문도 우려감을 나타냈다. 이 신문은 “대일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가 큰 영향을 받는다. 한국 기업 재고는 3~4개월 정도여서 생산 중단도 예상된다”고 전했지만, 한편으로는 파나소닉 관계자 말을 인용해 “일본 전자업체들의 생산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국내 반도체업계,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삼아야"

물론 국내 기업들이 혼란을 겪을 우려는 있다. 소재 수입 일정에 차질이 생기거나 공급량에 문제가 생기면 1차 피해는 관련 기업에게 돌아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이 위기를 새로운 도약의 기회로 삼자는 의견도 제기된다. 차제에 공급처를 다변화하고, 궁극적으로는 기술 발전을 통해 첨단 소재의 국내화도 서두르자는 의견이다.

박재근 회장도 이 부분을 강조했다. 그는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업계들은 과거부터 공급처를 다변화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다”고 전했다. 박 회장은 “공급이 다변화 되지 않은 제품들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산업부와 국내 업계가 꾸준히 제조회사 및 소재 관련 업체를 육성 중”이라고 전했다. 아울러 “이번 일을 계기로 속도를 더욱 높이자는 논의도 이뤄지는 중”이라고 귀띔했다.

박 회장은 “그 동안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실력 수준이 많이 올라왔다”고 밝히면서 “정부에서 지원을 강화하는 등 국내 기술력 개발에 박차를 가하면 위기를 기회로 삼는 반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정부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정부, 청와대는 3일 국회에서 고위당정청협의회를 열고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개발에 매년 1조원 정도 집중적인 투자를 준비하고 있으며 관련 예비타당성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조정식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의장은 “7월 중 경쟁력 강화 대책이 별도로 발표될 것”이라는 계획을 밝혔다.

 

지난 1일 오후 정승일 산업통상자원부 차관 주재로 열렸던 반도체, 디스플레이 업계 긴급대책회의 당시 모습 (사진=연합뉴스)
지난 1일 정승일 산업통상자원부 차관 주재로 열렸던 긴급대책회의 당시 모습 (사진=연합뉴스)

 

◇ 반도체 핵심소재 일본에만 의존하지 말고...장기적 대안 마련 필요

반도체·디스플레이 관련 대기업들은 관련 이슈에 대해 공식 언급을 자제하는 추세다. 기업과 기업이 1:1로 맞서는 문제가 아니라 외교적 이슈가 복잡하게 얽힌 사안인 만큼, 정부 차원의 폭넓은 대응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해당 기업 관련자들은 “현 시점에서 일본발 이슈에 대해 내놓을 공식 입장은 없으며 내부계획 등 대응책도 지금은 확인해주기 어렵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심지어 “멘트를 인용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한 관계자도 있다. 정부와 산업계 전반이 힘을 모아 장기적인 대응이 필요한 사안이므로 개별 기업이 독자적인 입장을 내놓는 것은 타이밍상 적절하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소재 기술의 국내화 관련해서는 어떤 시도들이 이뤄지고 있을까. 국내 소재 관련 기업들은 이번 사태가 현실화하기 전부터 정부에 '테스트베드'를 만들어달라고 요청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테스트베드는 소재 및 장비업체가 개발한 기술을 실제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생산기업의 제품에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지 점검하는 곳이다. 국내 업계는 현재 관련 시설이 전반적으로 부족한 상태다.

업계에서는 'R&D자금 지원과 더불어 관련 인프라 구축에도 힘을 기울여야 한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특히 반도체·디스플레이가 국내 산업의 미래 동력 중 하나인 만큼 장기적인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일본이 스스로에게 돌아올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강경한 입장을 내보인 만큼, 우리나라도 경제안보라는 관점에서 단기적인 해결책 마련 뿐만 아니라 중장기적인 대안 마련에 집중해야 할 때가 됐다는 위기 인식이 정부와 경제 산업계 전반에 걸쳐 확산되고 있다. 

반도체는 첨단 기술의 집약체다. 핵심 소재를 빠르게 개발하거나 품질을 단기간에 높이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국내 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반드시 이뤄내야 할 문제인 만큼, 정부와 각 기업, 산업계 전반이 힘을 모아 극복해야 과제로 떠오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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