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철학적이고 예술적이고 혁명적인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사진=반비 제공)

[소비자경제=유주영 기자] “지난해 한국인들이 부정한 정권에 맞서 뭉치는 모습은 감동적이고 경이로웠습니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서 우리의 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놀라지 않았습니다. 공적 공간으로 걸어 나오는 비무장 시민들이 엄청난 힘이라는 것, 때로 자치의 힘이기도 하고 때로 압제 정권, 불량 정권을 막아내는 힘이기도 하다는 것은 이 책의 주제 중 하나입니다.“

맨스플레인’의 작가이자 2010년 《유튼리터》가 꼽은 ‘당신의 세계를 바꿀 25인의 사상가’인 리베카 솔닛. 솔닛의 글은 한국 독자들에게서도 깊은 공감과 지지를 받고 있다. 각각 2015년과 2016년 한국에서 출간된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와 『멀고도 가까운』은 다수의 매체가 선정한 올해의 책에 이름을 올렸다. 

지난 2016년 가을부터 2017년 봄까지 수백만 명의 시민들이 광장에서 이루어낸 민주주의의 성취를 인상 깊게 지켜본 솔닛은, 펴낸 지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걷기의 인문학』이 여전히 유효한 이유를 하나 더 발견했다고 전한다. 이 책의 주요 주제이기도 한 ‘공적 공간으로 걸어 나오는 비무장 시민들의 힘’이 그것이다. ‘가장 위대하고 아름다운 힘의 경험’을 아름답고 명료한 언어로 되살린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 저자는 한국의 시민들에게 다시금 뭉클한 감동을 전한다.

깊은 사유와 매혹적인 글쓰기, 리베카 솔닛 에세이의 정수
역사, 철학, 정치, 문학, 예술비평을 아우르는 인문학적 에세이의 전범

리베카 솔닛의 책을 또 다른 기준으로 분류하자면 두 종류로 나뉜다. 여러 편의 짧은 시의적 에세이들을 묶어서 낸 책과 처음부터 끝까지 한 호흡으로 써내려간 에세이. 그리고 이 책은 후자 중에서도 가장 밀도 높게 한 가지 주제에 천착한 책이다.

솔닛은 역사, 철학, 정치, 문학, 예술비평 등 인문학의 전통적인 방법론을 유려하게 엮어내는 한편, 개인적 경험을 녹여내 보다 풍부한 여정을 만들어낸다. 

작가는 이 책을 텍스트 연구와 고증뿐 아니라, 두 다리로 직접 걸어 다니고 경험하며 써 내려갔다. 걷는 사람들과 그 모임, 걷는 장소들, 걷기의 형태와 종류, 걷는 일을 담은 문학과 예술, 그리고 걷는 신체의 구조와 진화,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사회적 조건 등 걷기의 거의 모든 요소와 측면을 총망라하여 궁극적으로 걷기라는 행위가 인간에게 갖는 의미와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요컨대 인문학적 에세이의 전범이다.

『걷기의 인문학』이 다루고 있는 수많은 역사 속 인물, 정전(正傳), 사상, 사건 등은 통합적인 의미로 해석되고 재구성된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정신 vs. 육체, 사적인 것 vs. 공적인 것, 도시 vs. 시골, 개인 vs. 집단 같은 전통적인 철학적 모티프에 대해 솔닛 식으로 소화된, 소수자의 관점과 목소리를 배제하지 않는, 전혀 새로운 답안을 얻을 수 있다.

걷기의 역사와 걷기의 위기 

걷기의 의미: 걷기가 왜 인문학적 탐구의 주제가 되어야 하는지 솔닛은 대단히 설득력 있는 근거들을 제시한다. 걷기는 생산 지향적인 문화와는 애초부터 거리가 있는 행위이며, 그 자체가 수단이자 목표인 행위이다.

이것은 인문학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특성이다. 솔닛에 따르면 마음을 가장 잘 돌아보는 길은 걷는 것이다. 이 책 전체는 “걷기의 역사가 생각의 역사를 구체화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생산 지향적 문화에서는 대개 생각하는 일을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으로 간주하는데, 아무 일도 안 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 일도 안 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은 무슨 일을 하는 척하는 것이고,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에 가장 가까운 일은 걷는 것이다. 

인간의 의도적 행위 중에 육체의 무의지적 리듬(숨을 쉬는 것, 심장이 뛰는 것)에 가장 가까운 것이 보행이다. 보행은 일하는 것과 일하지 않는 것, 그저 존재하는 것과 뭔가를 해내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다. 생각과 경험과 도착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육체노동이라고 할까. (20쪽)

내가 걷기를 좋아하는 것은 느리기 때문이다. 마음도 두 발과 비슷한 속도(시속 5킬로미터 이하)가 아닐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생각이 맞다면, 현대인의 삶이 움직이는 속도는 생각의 속도, 생각이 움직이는 속도보다 빠르다.(28쪽)

한 장소를 파악한다는 것은 그 장소에 기억과 연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씨앗을 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장소로 돌아가면 그 씨앗의 열매가 기다리고 있다. 새로운 장소는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가능성이다. 세상을 두루 살피는 일은 마음을 두루 살피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세상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 다녀야 하듯, 마음을 두루 살피려면 걸어 다녀야 한다.(32쪽)

저작권자 © 소비자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