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분열로 인한 혐오 현상, 인식 개선과 법적 규제 동반돼야

▲ 전 세계적으로 ‘헤이트 스피치’로 인한 문제들이 증가하고 있다. 국내의 경우 강남역 묻지마 살인 사건을 전후로 남녀간의 혐오 발언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출처=포커스뉴스)

[소비자경제=공동취재팀] 전 세계적으로 ‘헤이트 스피치’로 인한 갈등이 커지면서 이를 법적으로 규제하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국내에서도 법안 마련을 둘러싼 논란이 커지고 있다.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는 특정 국적, 인종, 성별, 종교, 집단 등에 대해 공개적으로 차별하거나 혐오하는 발언을 말한다.

헤이트스피치는 대중의 인식과 행동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험성’을 내재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특정 집단을 폄하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편견이나 폭력 등을 부추기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반유대인 정서, 동성애 혐오 등 특정 인종이나 국적, 종교, 성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선동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 韓, ‘헤이트 스피치’ 수면 위로 떠오르다

국내서도 남녀, 신구세대 등 서로 다른 집단 간 갈등을 조장하는 헤이트스피치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특히 인터넷을 중심으로 특정 집단에 대한 허위사실과 악성루머를 유포하고, 거리에서 헤이트 스피치를 벌이며 차별과 증오를 선동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대표적인 증오사이트 중 하나인 일간베스트의 경우 여성, 호남 지역민, 세월호 유족 등에 대한 비하 발언을 쏟아내고 있다. 포털사이트나 SNS를 통해 번져간 이 발언들은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샀다.

실제 5.18민주화운동 희생자의 사진을 두고 ‘홍어 말리는 중’, ‘홈쇼핑에서 배달될 택배 포장 완료’ 등 의 글을 작성한 일부 회원들은 5.18역사왜곡대책위원회에 의해 허위 사실 유포 및 모욕죄로 고소당하기도 했다. 

지난달 ‘강남 묻지마 화장실 살인사건’이 발생하면서 혐오 범죄에 대한 논란은 더욱 뜨거워졌다. 피해망상을 앓고 있던 범인이 사건 직후 여성에 의한 피해를 범행동기로 주장하면서 ‘여성혐오’가 도마에 올랐다.

이후 여혐, 남혐의 정서로 번지면서 난데없는 헤이트 스피치 성(姓) 대결이 벌어졌다. 

더 큰 문제는 특정 집단을 비하하는 용어들이 정확한 의미도 인지하지 못한 청소년들의 일상 속에 마치 유행어처럼 변질되고, 일부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사회적 약자를 차별하고 조롱하는 것이 하나의 웃음 코드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사회 전반적으로 만연한 불평등과 분열로 인해 이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김영 부산대 사회학과 교수는 “국내에 혐오 발언 및 행위가 특히 많은 것은 사회 전반이 비민주적이고 불평등이 심각하기 때문”이라며 “구성원 대부분 돈과 권력에 의한 억압을 느끼면서 타인을 자신과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래서 사람들은 죄책감 없이 자신이 받은 억압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곤 한다”며 “감정노동자에게 갑질하는 소비자가 많은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덧붙였다.

 

▲ 일본에서는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혐한시위’로 인해 ‘헤이트 스피치 규제 법안’을 제정했다. (출처=포커스뉴스)

◆ 日, 뿌리 깊은 혐한 정서에 ‘민족차별’ 인정

이웃 일본에서는 지난 24일 헤이트 스피치 규제와 관련된 법안이 제정됐다. 정식 명칭은 ‘일본 외 출신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적 언동의 해소를 향한 대응 추진에 관한 법안’이다. 

이는 일본에서 한국 및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헤이트 스피치가 오랜 기간 지속돼 왔기 때문이다.

일례로 지난 2009년 12월 재일동포 자녀들이 다니는 교토조선제일초급학교 앞에 일본의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이하 재특회)’ 회원 10명이 진을 쳤다.

이들은 교토조선학교가 부당하게 공원을 사용한다며 항의하고 ‘조선인을 보건소에 처분하라’, ‘북조선 스파이 자식’ 등의 증오 연설을 퍼부었다.

또 교사 내에서 점심식사 중이던 유치원생과 초등학생들에게 ‘김치 냄새 난다’, ‘일본에서 나가라 멍청이’ 등의 혐한 발언을 쏟아 냈고, 이후로도 차별선전 활동을 찍은 동영상을 유튜브에 업로드하며 한국인에 대한 증오를 조장했다.

당시 재특회의 강도 높은 혐오 발언으로 공포에 빠진 학생들은 등교를 두려워하거나 야뇨증을 겪는 등 부작용에 시달렸다.

이에 학교법인은 재특회 회원 9명을 대상으로 민사손해배상을 청구했고, 2014년 12월 일본최고재판소는 재특회의 헤이트스피치를 ‘민족차별’로 인정하며 총 1226만3140엔의 배상금을 선고했다.

보수적인 일본의 법원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민족차별을 인정하고 고액의 배상책임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인 판결 중 하나로 꼽혔다. 이처럼 혐한 활동을 자제하자는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관련 법안 제정으로까지 이어졌다.

 

▲ 세계적으로 ‘헤이트 스피치’로 인한 갈등이 커지면서 이를 법적으로 규제하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 증오발언은 곧 증오범죄…법으로 규제하는 유럽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겪은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증오발언을 범죄로 규정해 철저히 금지하고 있다. 특정 국적이나 민족, 종교 집단을 모욕하는 것은 물론 성적 지향, 장애 여부 등에 따른 차별 발언도 증오발언으로 분류하고 있다.

독일은 형법 제130조에 의거해 특정 집단을 향한 증오를 선동하거나 욕설과 악의적 비방, 명예훼손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발언에 대해 최고 5년까지의 징역형을 선고한다. 독일 국민이 외국에서 저지른 증오발언, 독일 내에서 벌어진 외국인의 발언까지 처벌할 수 있다.

프랑스도 형법으로 인종·국적·민족·지역·성별·성적 지향·장애 등에 대한 명예훼손과 모욕, 선동 발언을 금지하고 있다. 이를 어길 경우 최대 징역 1년, 4만5000유로(약 6000만원)의 벌금형에 처해질 수 있다.

영국은 민족적·인종적 증오를 선동하는 행위를 공공질서법에 반하는범죄로 규정하고 있고, 네덜란드·벨기에·노르웨이·덴마크 등도 형법을 통해 증오발언을 금지한다.

증오발언을 근절하기 위한 노력은 온라인에서도 이뤄지고 있다.

지난달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는 정보통신(IT) 기업인 마이크로소프트, SNS 기업인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 등 세계적인 인터넷 기업들과 ‘헤이트 스피치 차단 협약’을 맺었다.

이슬람국가(IS)와 같은 극단주의 세력이 온라인을 이용해 폭력과 테러를 정당화하고 새로운 조직원 모집하는 등의 움직임이 잇따르자 유럽연합이 칼을 빼든 것이다.

협약에 따르면 소셜미디어를 보유한 인터넷 기업들은 헤이트스피치 등 불법적인 온라인 게시물에 신속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담당 직원은 자신들이 운영하는 매체에 올라오는 글 중 특정 집단에 대한 근거 없는 비난, 혐오 발언 등이 포함된 글을 골라내고, 필요에 따라 24시간 이내 해당 글을 삭제하게 된다.

EU와 기업들은 헤이트스피치에 대항하거나 대안이 되는 담론을 개발하고, 인터넷 사용자들의 비판적 사고 함양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지원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앞으로는 페이스북·트위터·유튜브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헤이트 스피치’를 볼 수 없게 된다.

 

▲ 국내의 헤이트스피치 규제법안인 ‘차별금지법’은 보수주의 기독교 단체들의 반대로 제정되지 못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김정록 새누리당 의원 및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 등 관계자들이 서울 여의도 국회 정론관에서 ‘동성애 차별금지법’ 반대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출처=포커스뉴스)

◆ ‘동성애’ 논란에 발목 잡힌 차별금지법, 법 제정 제자리걸음

국내에서도 헤이트 스피치의 사례들이 늘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 및 각 단체들의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

법안을 통해 ‘헤이트 스피치’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지만, 헤이트 스피치에 대한 정의 및 규정이 명확하지 않아 법 제정이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미 여러 번 이와 유사한 ‘차별금지법’의 제정이 세 차례나 시도됐으나 실제 입법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차별금지법안은 대한민국 헌법의 평등 이념에 기초해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출신 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언어,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가족형태 및 가족상황, 종교,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범죄전력, 보호처분, 성적 지향, 학력, 사회적 신분 등을 이유로,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합리적인 이유 없는 차별을 금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07년부터 국회 회기가 바뀔 때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와 법무부의 주도로 차별금지법 제정이 추진돼왔다. 그러나 ‘성적 지향’을 문제 삼은 종교단체의 반발이 거셌다.

지난 2010년에는 개신교, 불교, 천주교, 원불교, 유교, 천도교, 민족종교로 구성된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가 “사회적 소수자 인권보호를 빌미로 ‘동성애차별금지법’과 같이 사회의 전통적인 사상적 근간 및 통념을 무너뜨리는 입법에 대해 적극 반대한다”고 공식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다 지난 2012년 유엔인권이사회가 직접 나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권고하면서 국회를 주축으로 한 법안 발의가 이어졌으나 여전히 반대에 부딪쳐 입법화되지 못했다. 특히 정부는 2010년 이후 어떠한 차별금지법안과 관련된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다.

◆ 전문가들 “무엇보다 사회 인식 개선이 우선돼야”

헤이트 스피치에 대한 법적인 처벌은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헤이트 스피치에 관대하다.

온라인 공간에서 특정 지역에 대한 노골적인 증오와 혐오를 부추기는 발언과 갖은 조롱이 이루어지고 있고, 최근 각종 범죄들로 비롯된 남녀 간 성(姓) 대결이 도를 지나치지만 이를 증오범죄로 규정해 강력 처벌하는 것에는 논란이 많다.

지난 15일 여성단체와 녹색당, 노동당, 정의당 등은 서울 광화문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여성대상범죄대책 전면 재검토와 차별금지법 제정 요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일부 혐오 세력들에 의해 ‘동성애, 이슬람, 세월호 척결’ 현수막이 거리에 버젓이 내걸리고 소수자혐오가 공공연히 표출되고 있다”며 “정부 부처 및 정당 역시 이에 가담하면서 사회적 소수자가 더욱 위험으로 내몰려있다”고 말했다. 만연한 소수자 혐오 및 규제되지 않는 현실들이 증오범죄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근거 없이 비난하고 혐오하는 일은 ‘표현의 자유’로 볼 수 없다. 표현의 자유는 반드시 보장되어야 할 핵심 가치인 반면 헤이트스피치와 같은 폭력과 증오와는 분명히 구분된다.

헌법에서도 모든 표현을 ‘자유’라는 미명으로 보호하지는 않는다. 헌법 21조 1항은 ‘모든 국민은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지만 4항에서는 언론, 출판의 경우 ‘타인의 명예나 권리,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를 침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거나 특정지역을 비난하는 글은 표현의 자유가 아닌 것이다.

일각에선 근본적인 인식이 개선돼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김영 부산대 사회학과 교수는 “헤이트 스피치를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만 근원적으로는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희영 여성민우회 활동가 역시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한 혐오는 모든 약자가 대상이 된다”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함께 노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배규한 국민대 사회학과 교수는 성급한 법률 제정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는 “우리 사회는 해외 사례들과 조금 상이한 부분이 있다”며 “특정한 국가나 인종에 대한 증오발언이라기보다는 개인이 내재된 분노를 표출하는 방향성이 더 크기 때문에 법적 규제는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어 “소득격차 등 사회의 불평등을 줄이고 사회 전반의 인식 개선이 이뤄지는 등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며 “섣부른 법적 규제는 오히려 사회통합을 저해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서예원·김은희 기자 npce@dailycn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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