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건 소비자주권시민회의 정책팀장
이동건 소비자주권시민회의 정책팀장

국내 증권사들이 금융소비자들을 불편하게 하는 주된 이유로 전산장애가 있다. 작년 1월부터 8월까지 금융업권 전산장애는 증권사에서 가장 많이 발생했으며, 전체의 36%에 달했다. 전산장애는 컴퓨터와 모바일 기기로 증권을 거래할 수 있는 HTS, MTS 프로그램에서 서버 오류가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전산장애가 발생하면 프로그램이 ‘먹통’이 되어 시세를 추적할 수 없거나 원하는 주문을 체결하지 못하기도 한다.

전산장애는 HTS의 보급과 함께 계속 이어져 온 문제이지만, 소비자들은 문제가 개선되는 것을 좀처럼 체감하기 어렵다. 특히 주식 청약 시기와 상장 첫날에는 트래픽이 급증하여 전산장애가 발생하기 쉬운데도 증권사들은 이에 대한 대처가 미비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증권사들이 진정으로 전산장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MTS가 대중화되며 언제 어디서나 모바일 주식 앱을 이용할 수 있게 되자 실시간으로 주가 흐름에 대응하고자 하는 투자자들도 늘었다. 이러한 이용자들에게 전산장애는 치명적이다. 변동성이 큰 장에서 주가가 하락할 때 손절매를 하는 것도, 일시적인 하락에서 추가매수를 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반대로 초단기 급등 추세에서 매도하는 것 역시 어렵다. 전세계 투자자들의 각축장에서 전산장애는 이용자의 손과 발을 묶어버린다.

증권사들은 전산 시스템 관리뿐 아니라 피해보상 기준도 구시대적이다. 대부분의 증권사들은 전산장애로 소비자가 피해를 입었을 때 ‘전화기록이나 전산시스템상에 주문로그가 남아있는 주문건’에 한해 보상한다는 기준을 세우고 있다.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보상기준이다. 전화 주문을 이용하는 투자자는 거의 없으므로, 투자자는 보유하고 있던 주식 등을 HTS/MTS 상의 매도창에 올려두지 않는 이상 보상받을 수 없다. 그런데 전산장애로 HTS/MTS에 접속조차 되지 않는 상황에서 매도 의사를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납득할 수 없는 보상기준으로 피해배상에 나서는 것은 증권사들의 책임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

금융소비자 사이에서는 매매 내역을 증거로 남기기 위해 매번 녹화를 해야 하느냐는 자조 섞인 소리가 나온다. 올해 한 유튜버가 생방송 중 HTS를 사용하여 트레이딩을 하던 중 주문을 시도했으나 전산장애로 주문이 등록되지 않았고, 가격이 급변하여 피해를 입게 되었다. 증권사에 문의한 결과 주문내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답변을 받았지만, 매매과정을 녹화한 증거가 있어 피해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해당 증권사는 보상을 해줄 테니 영상을 유튜브에서 삭제해 달라고 요청하기까지 했다.

금융소비자들이 받은 피해보상액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2019년에는 전산장애로 인한 피해가 발생했을 때 증권사들은 피해자 1인당 777,957원을 보상해 주었지만, 2023년 8월 기준으로 보상액은 그 1/10도 안 되는 72,347원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증권사들은 그만큼 큰 피해를 주는 전산장애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얘기하지만, 전산장애 피해를 보상하지 않는 증권사도 여전히 존재한다.

분명한 것은 전산장애 건수는 매년 증가하는 추세이며, 금융소비자들의 불편도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상존하는 전산장애 리스크를 없애기 위해 증권사들이 진심으로 노력하지 않는 이유는 금융당국의 미약한 처벌이 한몫한다. 소비자에게 지나치게 깐깐한 조건으로 보상하거나 혹은 아예 보상하지 않더라도 증권사들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않는다. 평소에 전산 관리가 적절히 이루어지도록 과징금 액수를 상향해야 한다. 또한 피해자에게는 제때 거래하지 못해 생긴 손실을 전액 보상함과 함께, 전산장애 발생일로부터 계산한 지연이자까지 지급해야 한다. 우리나라가 금융 선진국이 되려면 금융소비자에 대한 권리 존중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이동건 소비자주권시민회의 정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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