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적 따라 울고 웃는 CEO들

희비 엇갈리는 女帝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VS 칼리 피오리나 HP 前 CEO
현 회장, 뚝심경영으로 대북사업 정상화
피오리나, 컴팩과의 합병 실패로 낙마
정몽헌 회장의 사망 후 가정주부에서 그룹 회장으로 변신한 현정은 회장은 조용하고 감성적이면서 결단력 있는 CEO로 올 한해 집중조명을 받았다. 뚝심과 감성이 결합된 현 회장 특유의 리더십은 현대그룹을 안정적으로 이끌어나가고 있다는 평이다.
김윤규 전 현대아산 부회장의 대표이사직 박탈로 위기에 몰린 금강산 관광사업이 다시 활로를 찾은 것도 현 회장의 뚝심경영 덕분이었다. 대북사업을 실질적으로 주도해오던 김윤규 부회장이 개인 비리 혐의로 퇴출되자 북한은 즉각 금강산 관광을 부분 축소시키고 롯데관광과의 개성관광 협상을 시도하는 등 현대 따돌리기에 나섰다.
그러나 현 회장은 일희일비하지 않고 뚝심으로 위기를 돌파해나갔다. 북측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강력한 대북의지를 갖고 북측 달래기에 나섰다. 북한이 롯데관광과 개성관광 협상을 시도할 때에도 현 회장은 “형제(북한)가 우리의 바뀐 모습을 인정할 때까지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야 하며 더욱더 진정어린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며 오히려 북측의 결단을 기다렸다.
결국 현 회장은 북측으로부터 공식적인 대북 파트너로 인정받았고 향후 대북사업을 직접 챙길 계획이다. 지난 11월 금강산관광 7주년을 맞아 금강산을 방문한 현 회장은 “올해는 금강산관광이 시작된 이래 가장 힘든 어려움을 겪었지만 내년부터는 좀더 어른스런 모습으로 꿋꿋하게 헤쳐나가겠다”며 대북사업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드러냈다.
반면 미국에서는 IT의 여제(女帝)로 통하던 칼리 피오리나 전 HP CEO가 불명예 퇴진되는 사건(?)이 있었다. 업적 지상주의에 빠진 피오리나 전 회장은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통해 수익성을 확보하려 했으나 조직내 불협화음을 초래, 결국 CEO자리를 내놓고 말았다.
그동안 피오리나 전 회장은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CEO로 6년 연속 선정되는 등 IT업계 ‘여제’로 군림해왔다. 1999년 세계 2위 컴퓨터업체인 HP의 최초의 전문경영인으로 영입된 이래 2002년 이사회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190억 달러에 컴팩컴퓨터와의 합병을 성사시켰다.
그러나 이것이 피오리나의 발목을 잡았다. PC부문에서 델을 따돌리기 위해 컴팩 인수를 강행한 피오리나는 PC 부문의 영업이익이 2004년 전체 매출 중 3%를 차지하고 프린터 부문 이익도 11∼13% 늘어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HP는 PC부문의 매출이 늘어났지만 비용도 함께 늘어 기대수익을 얻지는 못했다. HP 주가도 지난 5년간 50%나 급락했다.
게다가 이러한 구조조정과정에서 HP의 기업문화를 무시한 게 화근이었다. HP는 설립 당시부터 경영진과 종업권간의 격의없는 대화가 강점이었다. 설립자인 휴렛과 패커드는 사내를 돌아다니며 직원들과 대화하기를 즐기면서 혁신적인 제품들을 개발해냈다.
그러나 피오리나는 딱딱한 회의와 사업계획 발표를 더 중요시했고 직원들과의 면담도 수주전부터 접수해야 가능할 정도로 높은 곳에 있었다. 언론에서 그녀를 추켜세울수록 조직원들의 마음은 그녀로부터 멀어져간 것이다.
결국 피오리나는 컴팩과의 합병효과를 따지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일부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물러나야만 했다.
오너경영인의 등장과 몰락
최태원 SK그룹 회장 VS 장흥순 터보테크 前 회장
최 회장, 경영권 방어 후 대외활동 활발
장 前 회장, 분식회계로 벤처신화 몰락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소버린과의 경영권 분쟁에서 승리한 후 부쩍 달라진 행보를 보이고 있다. 경영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대외행사에도 자주 얼굴을 내밀고 있다.
지난달 열린 APEC CEO 서밋에서는 국내 4대 그룹사 회장 중 유일하게 참석, 왕성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초청 청와대 만찬에서 중국을 비롯해 베트남, 러시아, 페루, 인도네시아 등 5개국 정상을 만났다. 또 푸틴 러시아 대통령 초청 만찬에서는 양국간 경제, 에너지 협력 방안을 논의하는 등 외교성과까지 거뒀다는 평가다.
최 회장이 본격적으로 경영활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소버린으로부터 경영권을 되찾은 지난 올해 3월부터. SK 정기주총에서 찬성 60.63%, 반대 39.17%의 압도적인 표 차이로 등기이사에 재선임된 최 회장은 2년만에 드디어 경영권 분장에서 해방됐다.
경영권 분쟁에서 벗어나자 최 회장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지배구조 개선이다. 개별기업 스스로 생존조건을 갖추고 자율적으로 회사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조직으로 빠르게 전환할 것으로 주문하고 나섰다.
그는 “나는 재벌이라는 말이 싫다. 그룹이란 말은 재벌이라는 지배구조에서 나온 것인데 이는 과거에나 가능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기업을 이끄는 시스템이다. 누가 주식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일을 추진하는 시스템을 가졌느냐는 것”이라며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이와 함께 이사회 중심 경영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이사회를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고 결정도 투명해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현재 SK의 이사회는 10명 가운데 7명이 사외이사로 구성될 정도로 외부인사의 비중이 높다. 최 회장은 “이사회 중심 경영은 생존의 문제”라며 처음에는 효율성이 좀 떨어지겠지만 궁극적으로는 효율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의지를 갖고 있다.
벤처업계 대표 오너경영인이었던 장흥순 터보테크 前 회장은 최 회장과는 달리 올 한해를 악몽으로 마무리했다. 1세대 벤처기업인으로서 벤처기업협회 회장, 코스닥상장법인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하다 올해 11월 배임 및 횡령, 분식회계 문제로 곤욕을 치루고 있다. 장 전 대표는 급기야 700억원대 분식회계를 한 혐의로 지난달 26일 구속됐다.
사건의 전말은 20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터보테크는 4만원대의 주가를 유지하며 잘 나가는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하지만 장 회장은 이때 840억원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유상증자에 참여해야 했다. 터보테크의 지분 22%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사업에 자신이 없어서 지분을 줄인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결국 그는 소유지분을 담보로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아 유상증자에 참여했다.
그런데 뜨겁게 달아올랐던 벤처열풍이 한순간에 식어버리고 주가도 곤두박질치면서 장 전 대표는 금융권에 회사 예금을 추가 담보로 제공했다. 그러나 주가가 되살아나면 주식을 팔아 대출금을 갚으려던 그의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고 결국 700억원이라는 분식회계를 떠안게 됐다. 장 전 대표는 코스닥 시장의 기형적 모습이 낳은 희생양인 셈이다.
전문경영인, 능력으로 평가받다
홍기화 KOTRA 사장 VS 김윤규 현대아산 前 부회장
홍 사장, 성공적 조직개편 진두지휘
김 前 부회장, 대북 1세대의 씁쓸한 퇴장
홍기화 KOTRA 사장은 올 한해 가장 주목받는 CEO 중 한 명이다. 1962년 KOTRA 창립 이래 내부 출신자로서 처음 사령탑에 오른 데다 조직개편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면서 경영능력을 높이 평가받고 있다.
홍 사장은 취임과 함께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성공한 기업들이 쇠퇴의 길로 접어드는 첫 징후가 ‘벤치마킹 대상이 되는 것’”이라면서 “그동안의 성과에 안주하지 않고 임직원의 자발적인 참여 속에 지속적으로 혁신을 추진하겠다”며 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홍 사장은 우선 전세계 101개 코트라 해외무역관을 산업군별로 묶는 벨트사업을 추진키로 했다. 이전에는 같은 업종이라도 해외무역관들의 개별적으로 업무를 해왔지만 앞으로는 세계 각국의 관련 무역관이 서울의 동대문상가, 대구와 밀접하게 일하는 방식으로 바꾸겠다는 것.
아울러 KOTRA맨을 적극 중용하던 인사정책을 탈피해 나가고 있다. 홍 사장은 “조직경쟁력 강화를 위해 소위 순혈주의를 과감히 벗어난 개방형 인사제도를 도입할 것”이라며 “이미 거시·산업경제, 국제통상, 중국경제 분야의 박사급 전문인력 5명을 공개 채용해 정보분석 기능을 크게 강화했다”고 밝혔다.
특히 미수교국인 쿠바 아바나에 해외무역관을 개소한 것은 홍 사장 취임 후 최대 성과로 손꼽힌다. 이로써 KOTRA는 사실상 북한을 제외한 전세계에 네트워크를 갖추게 돼 앞으로 중미 카리브해 연안국가에 대한 우리 기업들의 시장진출에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전문경영인으로서 올 한해 가장 불명예스럽게 퇴진한 CEO는 김윤규 현대아산 前 부회장이다. 정주영 회장-정몽구 회장의 뒤를 이어 실질적으로 대북사업을 주도해온 김 전 부회장은 올해 11월 등기이사직마저 박탈당했다.
현대측은 김 전 부회장의 퇴출결정에 대해 “김 전 부회장이 남북경협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각종 개인비리와 직권 남용, 독단적 업무처리 등으로 사업과 회사의 이미지를 실추시켜 심각한 손해를 입혔다”고 설명했다.
김 전 부회장은 1969년 현대건설에 입사한 뒤 현대의 대북사업을 총괄 지휘해온 대북사업 1세대. 고 정주영 회장 시절부터 대북사업에 참여한 그는 1989년 정주영의 소떼 방북을 직접 수행했으며 고 정몽헌 회장의 뒤를 이어 대북사업의 실질적인 수장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현정은 회장 체제에서는 그의 방식이 먹혀들지 않았다. 올 초부처 현 회장과의 갈등성이 불거졌고 그룹 감사실은 지난 6월 25억 상당의 비자금을 김 전 부회장이 조성했다는 내용의 내부 감사보고서를 냈다. 이로써 김 전 부회장은 결국 11월 현대로부터 완전히 퇴출됐다.
그는 “나로 인해 현대의 대북사업에 차질이 빚어졌지만 대북사업은 당연히 현대가 해야 한다. 다른 기업이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못 박았다.
그러나 김 전 부회장은 개인 비리혐의에 대해서는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그는 “오너가 아닌데 오너처럼 행동한 것이 잘못이라면 책임을 지겠다”며 “현대를 떠난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다른 기업에서 대북사업을 수행할 뜻은 없다”고 강조했다.
마지막 대북사업 1세대였던 김 전 부회장의 퇴출로 인해 우리나라 남북경협사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됐다.
황선아 기자
hsa@ceo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