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정청 “소재·부품·장비산업 경쟁력 강화 위한 특별조치법 발의 예정”
기업 학계 지자체 등 각 업계 모든 역량 동원해 총력 대응 중
기술독립 장기 행보와 엉킨 경제교류 실타래 풀기 위한 노력 병행해야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가 일본발 도전에 직면했다. 사진은 지난 3월 이낙연 총리가 SK하이닉스 중국 충칭 공장 방문 당시 모습 (사진=연합뉴스)
한일 경제전쟁이 반도체 소재를 넘어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면서 국내 재계는 물론이고 당정청과 학계, 각 부처 등에서 총력 대응에 나섰다. 사진은 지난 3월 이낙연 총리가 SK하이닉스 중국 충칭 공장 방문 당시 모습 (사진=연합뉴스)

[소비자경제신문 이한 기자] 일본발 수출규제 변수가 산업계를 강타한지 3개월 가까이 지났다. 반도체 업계를 비롯한 국내 산업계는 이번 일을 계기로 부품수급처 다변화 및 기술독립에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제기됐다. 국내 대응상황을 돌아보고 향후 과제를 짚어본다.

◇ 당정청 “소재·부품·장비산업 경쟁력 강화 위한 특별조치법 발의할 것”

더불어민주당과 정부, 청와대가 오늘(26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일본 수출규제 대응 당정청 상황점검·대책위원회 3차 회의를 열었다. 당정청은 이 자리에서 소재·부품·장비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특별조치법과 일본에 대한 WTO 제소 관련 사항 등을 논의했다.

윤관석 민주당 정책위 수석부의장은 회의 후 브리핑을 통해 "지난 8월 5일 정부가 발표한 소재·부품·장비 강화 대책을 모든 역량과 자원, 수단을 총동원해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 특별법의 범위와 대상을 확장하고, 획기적이고 전향적인 정책 수단과 규제 특례를 담기로 했다"고 말했다.

윤 수석부의장은 "범부처 경쟁력 위원회 설치와 특별회계 신설 등 강력한 추진체계를 제도적으로 마련하기로 했다"고 말하면서 "이번 정기국회 내 관련 법안을 신속하게 처리해 소재·부품·장비 강국 도약을 적극 지원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당정청은 회의 내용을 토대로 특별조치법 개정안을 확정하고 조만간 당론으로 발의한다.

회의에 참석한 노형욱 국무조정실장은 "특별조치법은 우리 산업과 경제의 경쟁력을 근본적으로 강화하기 위해 기본법의 대상 범위, 기능, 방식, 체계를 20년 만에 개편하고 일몰법을 상시법으로 전환하려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당정청 3차 회의에는 더불어민주당 정세균 위원장과 조정식 정책위의장, 윤관석 정책위 수석부의장 등이 참석했고 정부에서 노형욱 국무조정실장과 정승일 산업통상자원부 차관, 청와대 이호승 경제수석이 참석했다.

◇ 한일 경제 전쟁 역사, 25년 전 반도체로 '경술국치' 극복하며 시작

한일 경제전쟁의 출발은 지난 7월 '반도체 소재'였다. 하지만 이것은 3개월만의 이슈가 아니다. 사실 한일 경제 전쟁의 주요 변곡점이 과거에도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인 1994년이다. 그때의 치열한 한일경쟁도 반도체를 둘러싸고 이뤄졌다.

당시 삼성전자가 세계 최초로 256MD램을 시장에 공개했다. 그 시절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주름잡던 일본을 제치고 거둔 성과였다. 이를 계기로 한국은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잡고 세계 반도체 업계의 패자로 올라서는 디딤돌을 쌓았다.  ‘메가디램’이라는 용어가 한동안 일반 소비자들 사이에서 익숙해진 것도 이때부터다.

당시 삼성전자는 256MD램을 8월 29일날 공개했다. 무심코 고른 날짜가 아니다. 그 날은 ‘경술국치일’ 이후 85년째 되던 날이었다. 이에 대해 김광호 당시 삼성전자 사장은 언론을 통해서 “적어도 D램 기술에서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평등했던 구한말 이전 상태로 돌아갔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한 것”이라고 회상했다.

25년이 흘러 일본이 소재 부품을 무기로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을 저격했다. 첨단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 소식이 들리자 업계는 혼란에 빠졌다. 제한된 거래처, 미진했던 정부 투자 등 반도체 산업에 대한 ‘불편한 진실’도 일부 드러났다. 반도체 장비와 소재의 국산화율이 각각 18%와 48%로 이는 지난 10년간 정체돼 있는 것이라는 문제도 제기됐다.

이후 정부와 산업계는 대책 마련에 나서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소재·부품·장비 국산화를 위한 예산 5조원을 3년간 투자하겠다는 계획이 발표됐다. 인력 양성 정책도 마련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을 비롯한 업계도 국산화 등에 대한 의지를 내비치며 다양한 조치를 마련하고 있다.

◇ 소재 국산화 및 기술 독립 위한 총력 대응 필요

한일 경제전쟁을 두고 업계에서는 ‘위기를 기회로 삼는 현실적 노력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아 강조한다. 소재 국산화 및 다변화, 그리고 기술 독립 등을 통해 산업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지자는 목소리다.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 박재근 회장(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은 일본의 조치가 현실화했을 당시 <소비자경제>와의 통화에서 수출규제에 관한 의견을 밝힌 바 있다. 당시 그는 “그동안 국내 반도체 기업들의 실력 수준이 많이 올라왔다”고 밝히면서 “정부에서 지원을 강화하는 등 국내 기술력 개발에 박차를 가하면 위기를 기회로 삼는 반전이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철 산업연구원 산업통상연구본부장은 25일 ‘우리기업의 해외진출 패러다임 변화와 과제’ 토론회에서 주제발표를 통해 “일본은 글로벌 밸류체인 참여도가 높은 우리나라에 소재부품 수출을 제한하면 우리 산업에 악영향을 줄 것으로 판단했지만, 오히려 일본기업의 신뢰를 붕괴시켜 일본산업 위기를 가져올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지금이 우리가 소재 장비를 국산화하고 수출산업화할 시기”라고 강조했다.

방향성에는 모두 공감한다. 문제는 구체적인 해결 방안이다. 예산과 시간과 인력이 필요한 일이다. 조 본부장은 지난달 열린 ‘글로벌 가치사슬 재편과 한국 소재·부품산업의 대응’ 정책 세미나에서는 이에 관한 과제에 대해서도 언급한 바 있다. 조 본부장은 “대체품의 거래정보 및 거래지원, 신속한 수입허가 및 통관지연 해소로 생산 애로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과제를 제시했다.

아울러 “기계 산업 부품은 독일산으로 대체 가능하나 기존 일본산 공작기계와의 호환성 문제가 있으며 유지 보수 비용 증가 및 새로운 장비 도입에 따른 숙련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 “긴급 자금 지원, 수입허가 및 통관지연 해소 등 단기적 지원과 더불어 장기적으로 국산 대체재 개발을 위한 생산 및 기술 지원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학계와 지자체 등의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카이스트는 전, 현직 교수 100여명이 ‘소재.부품.장비 기술자문단’을 운영한다. 경기도는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국산화를 위한 산학연·관 연구협력체인 ‘소재부품 연구사업단’을 구성, 운영하기로 했다.

◇ 수출 기업 향한 구체적인 지원 방안 다각도로 마련 중

수출규제가 반도체 핵심 소재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면서 기업에 대한 지원방안도 쏟아졌다. 국세청과 주요 기업간 수출규제 관련 세제지원 논의가 이뤄졌고, 중소벤처기업 수급거래선 다변화를 위한 지원 방안도 마련됐다.

대한상공회의소는 25일 ‘일본 수출규제로 피해를 본 기업에 세제지원을 확대해달라’고 국세청에 건의했다. 대한상의는 김현준 국세청장과 만난 자리에서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기업활력 제고를 위한 ‘10대 세정 과제’ 건의를 전달했다.

박용만 회장은 "글로벌 경기둔화에 더해 주요국 간 갈등, 일본 수출규제 등으로 대외 여건이 불확실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현준 국세청장은 "전국 125개 세무서에 설치된 ‘일본 수출규제 피해기업 세정지원센터’를 통해 세정지원을 속도감 있게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중소벤처기업의 수급거래선 다변화 등을 위한 지원 활동도 강화됐다.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은 국내 중소벤처기업의 일본발 부품 수입 의존도를 완화하고, 수급 거래선 다변화를 지원하기 위해 공단 홈페이지에서 ‘일본기업 대체 수입선 발굴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했다.

기업이 공단 홈페이지에 접속해 수입할 품목을 검색하면 해당 품목을 납품할 기업에 대한 제품 내역, 연락처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기업에 대한 거래선을 변경하려는 경우에는 해당 기업에 대한 신용조사저 발급, 부품조달을 위한 정책자금 지원 등 후속 연계지원도 가능하다.

중소기업진흥공단 수출마케팅사업처 최은영 대리는 <소비자경제>와의 통화에서 “미국 중국 등 해외 수출입기업 정보를 제공하는 서비스로 관련 품목 수출하는 해외 기업을 찾아주고 필요한 경우 후속지원과 연계하는 서비스”라고 소개했다. 아울러 “수출바우처 사업, 온라인 플랫폼 등 중진공에서 진행하는 타 사업과 연계될 수 있는 여력도 있다”고 말했다.

◇ 흔들림 없는 기술 독립 행보, 엉킨 실타래 푸는 노력 병행해야

정부 부처도 수출기업 지원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최근 범부처 '해외마케팅정책협의회'를 열고 해외마케팅·무역금융 4분기 지원 강화, 일본 수출규제 애로 기업 지원을 위한 지자체 협력 강화, 지자체 전략산업 연계 수출지원 방안 등을 논의했다. 중소·중견기업의 수출 활력 회복을 위해 7892억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산업부 박태성 무역투자실장은 “소재부품 수급 애로를 겪는 우리 기업이 대체 수입처를 발굴하는 등 긍정적인 성과가 조금씩 가시화 되고 있다”면서 “4분기 해외마케팅과 무역금융 집중지원을 통해 단기 수출활력을 높이는 한편, 일본 수출규제로 애로를 겪는 우리 기업들이 대체수입처를 발굴해 소재부품 공급망을 신속히 확보하고, 글로벌 공급망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을 강화해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코트라 무역관을 통해 대체 수입처를 발굴해 국내 기업과 연결해준 사례도 있다. 일본에서 불화계 코팅제를 수입하는 한 업체는, 수출규제로 수입지연이 예상되자 대체수입처 발굴을 요청했다. 이에 해당 품목 수출실적을 보유한 주요 9개국 23개 공급처를 대상으로 코트라 무역관을 통해 현지 공급처를 조사했다. 이 과정을 통해 4개국 21개 공급처를 발굴했고 적합도가 가장 높은 1개 공급처 제품을 제공했다.

일본에서 폴리이미드 필름을 수입하는 또 다른 업체도 코트라 무역관을 통해 4개국 25개 공급처를 발굴하고 그 중 품질이 우수한 것으로 판단된 3개 공급처를 제공한 바 있다.
 
산업계를 향한 노력이 다각도로 이어지는 가운데, 정부는 11일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에 대해 WTO(세계무역기구)에 제소하는 등 외교적인 대응도 이어가고 있다. 아울러 최근 한국과 일본의 경제인들은 직접 만나 “정치적 상황과 별개로 경제 교류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소재 다변화와 기술독립을 위한 장기적인 행보를 흔들림 없이 이어가되, 실타래가 꼬인 부분에 대해서는 현명한 해결책을 찾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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