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는 경운궁…종전에 비해 축소된 경운궁

▲ 덕수궁 전경.

[소비자경제 칼럼] 정동에서 가장 큰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경운궁(덕수궁)이다.

조선 중기 광해군때부터 경운궁으로 불리었으나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위된 고종이 이곳에서 덕을 누리며 오래오래 살라는 의미로 고종에게 덕수라는 존호를 올리고 이름을 덕수궁(德壽宮)이라 했다. 필자는 일제의 이름인 덕수궁이라는 이름 대신 경운궁이라 하겠다.

▲ 중명전.

경운궁이 가장 큰 규모였을 때는 서쪽으로는 경향신문 까지, 북쪽으로는 조선일보, 남쪽으로는 지금의 서울시립미술관에 까지 이르렀다. 약 4만여 평의 넓이였으나 지금은 2만평정도 된다. 절반 이하로 축소된 것이다. 지금의 경운궁 영역과 아울러 을사늑약의 현장이었던 중명전(重明殿), 덕수초등학교를 아우르는 선원전(璿源殿)까지를 포함했다.

▲ 러시아 공사관.

그것도 좁다 하여 러시아공사관 앞에서 운교(구름다리)를 내어 경희궁으로 바로 넘어 가도록 했고 남쪽으로는 시립미술관방향으로 다리를 내어 궐외각사를 삼았을 정도이니 그 규모를 짐작하겠는가? 한창때의 1/3정도로 줄어든 것이다. 그러니 정동하면 경운궁이요, 경운궁하면 정동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 경운궁과 궐외각사에 연결되었던 운교의 모습.

1392년, 임진왜란으로 우리의 자랑스러운 선조임금께서는 백성을 내팽개치고 의주로 몽진하였다. 1년여 만에 돌아오니 한양은 아수라장에 더 큰 문제는 왕이 기거할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경복궁과 창덕궁은 모두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다. 그러나 피폐한 국고로 전란 후에 새로운 궁궐을 짓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양에 그나마 파괴되지 않은 변변한 곳을 찾아보니 서소문안쪽에 쓸만한 집들이 몇 채 보였다. 왜군들이 주둔했던 지역이라 피해가 없었던 것이다.

주변에는 국사교과서에서 당쟁을 논할 때 처음으로 당이 갈라진 동인과 서인 중 서인의 영수라 할 수 있는 심의겸의 집이 있었다. 당파 싸움의 원인은 막강한 인사권을 가진 이조전랑의 자리를 놓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고 동인과 서인으로 갈리지 않았는가? 서인의 영수 심의겸은 서쪽에 살고 있었고 동인의 좌장격인 김효원은 건천동(마른내길,동대문)쪽에 살고 있어서 동인과 서인이 나누인 것이다.

그 서인의 대부인 심의겸의 집과 성종의형인 월산대군의 사저등 불에 타지 않은 집들 주변에 목책을 둘러 왕의 임시 거주 장소로 삼으니 왕의 임시 처소인 정동 행궁이 된 것이다. 선조는 경운궁의 석어당에서 살았는데 붕어(崩御)후에 왕이 된 광해군과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그 후로 무려 273년이나 방치되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경운궁이 역사의 주 무대로 등장한 것이 아관파천(俄館播遷)후인 1897년 2월이다. 그러면 고종은 왜 이곳으로 들어왔을까?  제 발로 걸어 나온 경복궁에 다시 갈수야 없어서, 이곳 정동에서 죽어가는 나라를 다시 한 번  일으키려는 야망 때문이 아니었을까?

당시 정동에는 11개 나라의 각국 공사관이 있었다. 그 열강들을 배경으로 일본과 한 번 맞짱 뜰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백성들은 그런 고종의 마음을 모르고 병신년인 1896년에 일어났다하여 “고종이 병신됐네 병신됐네”하고 놀렸다.

경운궁뒤에는 미국공사관이 있었고 맞은편에는 독일, 경향신문 맞은편의 프랑스, 그 뒤쪽에 러시아 공사관등 1882년부터 1900년 사이에 많은 외교관서가 무리지어 있었으니 정동은 그 당시 외교타운이었던 것이다.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기 이전인 1896년부터 이미 경운궁 주변의 땅을 매집하여 대대적인 궁역을 조성하였다. 인조이후 빈공간의 쇄락한 좁은 정릉동 행궁을 번듯한 공간, 왕과 수많은 신하와 궁녀들이 거하는 정궁으로 만든 것이니 백성들의 조롱을 고종은 별로 신경쓰지 않은듯하다.

이곳에 와서 왕의 나라가 아닌 황제가 다스리는 제국을 선포했으니 이곳을 정궁으로 삼아 강력한 국가의 꿈을 꾼 것이다. 이렇듯 다양한 이야기가 역사속에 숨어있는데.. 그런데 그 꿈이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고종의 한숨소리, 고종이 60세에 난 고명딸 덕혜옹주의 옹알거리는 소리, 이토오 히로부미와 그 친일 모리배들이 왕을 협박하는 소리들이 섞여서 녹아있다. 그 긴 한숨과 눈물이 점철(點綴)된 곳이 이곳 경운궁이니 그 역사의 현장속으로 한 번 들어가 보자. 이제 대한문이 우리 앞에 스르르 열려진다. 슬픔의 공간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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