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니스트 최송목
칼럼니스트 최송목

누구를 위해 충성할 것인가? 회사인가? 오너인가? 대표이사/CEO인가? 국가인가? 사회인이면 누구나 시간이 흐르고 간부, 임원으로 성장하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맞닥뜨릴 주제다. 충성의 방향이다. 

충성하는 주체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개인사업자의 경우는 회사, 오너, CEO가 동일하다. 이 경우는 주체가 하나로 일치되니 별로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조금 규모 있는 회사(법인)의 경우 회사, 대주주, CEO(전문경영인)로 나누어지고 부장, 이사, 부사장 등 직위가 올라가다 보면 자기가 충성하고 바라봐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내가 행하는 이 충성이 반드시 조직의 이익, 오너의 이익, CEO의 이익 그리고 직원들의 이익으로 잘 배분되고 선순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이익이 쏠리고, 누군가에게는 빠지거나 오히려 손실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충성은 항상 서로 충돌한다. 이때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공공기관 공무원이라면 당연히 국민의 눈높이와 국익에 충실하여 ‘국가’를 바라봐야겠지만,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 많은 공직자가 자기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상급자에 대한 개인적인 충성을 하거나 소속집단의 이익에 몰두한다. 처음에는 국가관이 뚜렷했던 사람도 인사권에 휘둘리다 보면 차츰 국가보다는 개인에 대한 충성심으로 변질하여 결국은 사당화, 독재화, 기관장의 개인 숭배로 이어지는 것이다.

국가 최고의 수장인 대통령의 경우도 이와 같은 충성의 방향에 오류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측근 장차관들이 국가가 아니라 대통령에 충성하는 것이다. 이를 대통령이 즐기게 되면 독재자가 되고, 측근이 즐기게 되면 간신배가 된다. 많은 고위 공직자들이 혼란스러워하고 있고, 일부는 개인의 입신양명을 최우선시하여 국민 눈을 피해 미필적 고의로 혼돈하는 척, 모른 척하기도 한다. 

최근 들어 ‘알아서 긴다’는 부정적 이미지가 되어버린 일본의 손타쿠(忖度)라는 말도 원래는 윗사람의 분위기와 심기를 잘 살핀다는 뜻의 좋은 의미였는데 변질된 것이다. 조폭 의리의 표본은 “내 편은 꼭 챙긴다. 한 번 인연은 끝까지 잊지 않는다”이다. 여기에는 “무조건, 어떤 것이든”이라는 백지수표 같은 ‘무조건’이 달려있다. 그것이 문제다. 개인 간에는 ‘무한신뢰’의 좋은 뜻이지만 조직이 커갈수록 ‘암’같은 존재로 부위가 확대되고 깊어지는 것이다. 암세포는 빨리 자라고 통제 불가능한 게 특징이다.

민주주의가 보편화되지 못하던 시절, 왕 개인과 국가의 일체형도 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작가 볼테르가 퍼뜨렸다고 전해지는 루이 14세의 “짐은 곧 국가다” 그리고 임찬상 감독의 영화 <효자동 이발사, 2004년작>에서 이발사 성한모(송강호 분)가 “각하는 곧 국가다” 라고 복창하는 대목이 나온다. 절대군주나 절대 권력자를 지칭하는 상징적인 말이다. 조직과 리더가 일체형이 되는 구조에서나 가능한 표현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이런 상품들은 여전히 인기가 높다. 인간의 지배 욕망은 변함이 없고 눈앞의 현실은 힘이 우선하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경우 대주주 오너의 입장에 설 것인지 CEO(전문경영인)의 라인에 설 것인지도 고민거리다. 잠깐 위탁경영을 맡은 CEO에 충실하면 오너의 판단에 의하여 CEO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수 있다. 그렇다고 대주주 오너 입장만 고수하다 보면 당장의 경영과 인사권을 거머쥔 CEO와의 관계에 갈등을 빚을 수 있다.

여기서 잠깐 충성의 손익계산서를 작성해보자. 충성의 현실적 득실이다. 충성은 과연 실용적일까? 예로부터 충신은 멋있는 단어이고 선망의 대명사였다. 지방 유적지 곳곳에 충신을 기리는 비석들이 즐비하다. 하지만 기리는 만큼 현실에서 실용적이었던가? 역사에서 충신은 비참하고 힘든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히려 아첨꾼과 변절자들이 호사를 누렸다. 진실이 실속을 보장해 주지 않았다. 국가, 사회에 대한 충성이 그 보상과 함수관계를 이루지 않았다는 뜻이다.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의 충실한 심복이자 책사였던 순욱의 경우가 그랬다. 그는 조조 개인의 이익에 반하여 국가를 우선 생각했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에 그간의 모든 충심은 무효가 되어 버림받고 죽임을 당했다. 충성이 빛나는 그 명성에 비해 현실에서 얼마나 비참하고 힘든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우리는 역사에서 좋은 사례만 학습하고 있는 게 아니다. 한때 일본 강점기를 비롯해 국가에 충성했던 많은 사람이 시간이 흐르면서 시류에 변절한 사례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도 충신이 역사의 시간을 관통하며 존경받고 비석이 세워지고 있는 것은 개인보다는 국가, 사회를 생각하는 충성 본질의 정의와 진정성 때문일 것이다. 지금 광화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이순신 장군은 왕(宣祖)을 위해 백의종군하고 수모를 감내하며 왜구와 싸우지는 않았다.

요즈음 연일 계속되는 여러 가지 진실 공방 속에서 ‘충성’은 또다시 우리에게 답을 묻고 있다. 지금 당신이 바라보는 충성은 누구를 위한 이익이고 누구를 위한 충성인가?

조직인가? 인연인가? 달콤하고 화려한 현실인가? 미래를 관통하는 신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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