럭키금성서 LG로 CI 변경, 과감한 결단 내려

故 구본무 LG그룹 회장. (사진=LG)

[소비자경제=오아름 기자] “제가 꿈꾸는 LG는 모름지기 세계 초우량을 추구하는 회사입니다. 남이 하지 않는 것에 과감히 도전해서 최고를 성취해야 하겠습니다.” 

이는 구본무 LG회장이 1995년 취임사에서 한 말이다. 

평소 故 구 회장은 사람을 중요시 했고, 기업 경쟁력의 원천은 인재에서 나온다고 강요시했다. 

구 회장은 1945년 2월10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구자경 명예회장(93)의 4남 2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1964년 연세대 상학과에 입학한 구 회장은 병역 만기제대 후 유학을 떠나 1972년 미국 애슐랜드대학을 졸업했다. 

이어 클리블랜드주립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은 후 1975년 LG화학(구 럭키) 심사과 과장으로 입사하며 LG그룹에 첫 발을 내딛였다. 

1989년 그룹 부회장에 올라 본격적인 책임경영을 시작한 뒤 1995년 2월22일 50세에 부친인 구자경 명예회장이 경영일선에서 은퇴하며 LG의 제 3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 해 '럭키금성'에서 'LG'로 CI 변경을 주도하며 글로벌 선도 기업으로 도약하는 기반을 다졌다.

23년간 LG그룹을 이끌면서 '전자-화학-통신서비스' 3개 핵심 사업군으로 구축해 경쟁력을 높였다. 도전과 혁신으로 전기차용 배터리 등 자동차부품, OLED 등 차세대 디스플레이, 에너지, 바이오 등의 분야에서 미래 먹거리도 발굴했다.

특히 구 회장은 '영속기업 LG'의 해답은 연구개발(R&D)와 인재라는 신념과 의지로 서울 마곡지구에 국내 최대 규모의 융복합 연구단지인 'LG 사이언스파크'를 완성시키는 등 투자와 육성에 열과 성을 기울였다. 

또 선진적 지배구조 구축에 대한 강한 의지로 국내 대기업 최초로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고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을 결단하는 등 영속할 수 있는 기업의 토대를 쌓았다.

아울러, 세계 1위 기업으로 발돋움한 LG디스플레이를 만든 것도 구 회장이었다. 외환위기가 닥쳤던 1998년 말, 구 회장은 당시 정부가 주도한 ‘빅딜 논의’로 반도체사업 유지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LG전자와 LG반도체가 각각 영위했던 LCD(액정표시장치) 사업을 떼어내 LCD 전문기업인 ‘LG LCD’를 별도로 설립했다. 

한편, 장례는 조용하고 간소하게 치르기를 원했던 고인의 유지와 유족들의 뜻에 따라 비공개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유족은 당초 가족 외 조문과 조화를 받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으나, 찾아온 조문객들을 돌려보내기 어려워 일부 조문은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조화 거의 받지 않았으나 문재인 대통령이 보낸 조화와 범LG가가 보낸 조화에 한해서만 수용해 빈소 내부에 세워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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