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금융실명제·OECD 가입 업적 남겨

▲ 서울 중구 서울시청 앞 광장에 마련된 김 전 대통령의 분향소를 찾은 한 시민이 조문하고 있다. (출처=포커스뉴스)

[소비자경제=박형수 기자] 대통령을 꿈꾸던 섬마을 소년에서부터 문민정부를 이루기까지,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사에서 어느 누구보다 굵직한 삶을 살았다. 군사독재 시절 가택연금을 당하고 단식투쟁을 벌이는 등 민주화 투사로서의 길을 묵묵히 걸어왔고, 최연소·최다선 국회의원이라는 명예로운 정치 이력도 얻었다.

대통령 재임 기간에는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척결하고 금융실명제를 도입하는 등 개혁에 앞장섰지만 임기 말 차남 현철씨가 한보그룹 사태 비리로 구속되고 외환위기를 막지 못했다는 오점을 남겼다. ‘대도무문(大道無門)’라는 본인의 좌우명처럼 거침없이 살아왔다.

◆ 섬마을 소년이 대통령이 되기까지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경남 거제 장목면 외포리에서 아버지 김홍조 씨와 어머니 박부련 씨 사이에서 6남매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멸치 어장을 소유한 부친 덕택에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승부사 기질도 남달랐다. 씨름을 하면 머리 하나 더 큰 형들이 기가 질려 도망가게 만들 정도였다. 외포소학교를 졸업한 뒤 43년 입학한 통영중학교에선 한국 학생들을 차별대우를 하던 일본인 교장을 골탕먹였다가 무기 정학을 당하는 등 어린시절부터 남다른 모습을 보였다.

광복 후 부산제2중학교(경남중) 3학년에 편입했다. 당시 하숙집 책상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을 써서 붙여 놓으면서 대통령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48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하면서 그는 꿈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대학 2년 때는 서울 명동서 열린 정부수립기념 웅변대회에서 2등으로 입상하면서 당시 외무장관이던 장택상씨와 인연을 맺고 정계진출의 기회를 잡았다.

6·25 전쟁 이후 그는 국회부의장이 된 장씨의 비서로 발탁됐고, 장 부의장이 52년 2월 국무총리가 되자 다시 총리실로 옮겨 인사담당 비서관이 된다. 이듬해 9월 장 총리가 총리직을 사임하자 김 전 대통령은 54년 5월 실시된 3대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고향인 거제로 돌아온다.

출마결심을 굳힌 그는 당시 자유당 총무부장이던 이기붕씨의 입당교섭에 따라 자유당 공천을 받아 만 25세라는 최연소 나이로 당선됐다. 이 당선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대변인 2번, 원내총무 5번을 역임하는 기록을 남겼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을 선포한 1972년 10월 후에는 1974년·1979년 신민당 총재를 맡아 야당의 지도자 역할을 했다.

1979년에는 박정희 정권에 의해 최초로 국회의원 직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이후 전두환 정권 하에서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의 공동의장과 1985년 신한국민주당의 고문, 1987년·1988년에는 통일민주당의 총재를 맡았다. 1987년 6월 민주화항쟁 이후에는 직선제로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당시 시민들의 정권교체 열망에도 불구하고 김영삼·김대중 두 후보는 후보 단일화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노태우 전 대통령을 당선되는 단초를 제공해 시민들의 원망을 사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14대 대통령에서 김대중 후보를 누르며 당선되어 마침내 대통령의 꿈을 이뤘다. 1998년 대통령 직에서 퇴임한 이후에는 2004년 북한민주화동맹 명예위원장 등을 맡았다.

◆ 금융·부동산 실명제 실시와 세계화 추진

김 전 대통령의 금융·부동산 양대 실명제 실시는 경제의 투명성을 가져온 대표적인 정책이다. 가명 또는 차명으로 금융자산과 부동산을 소유하며 막대한 부패와 비리 등 부정적인 지하경제를 형성하고 있는 자본을 수면 위로 드러냈다.

취임 첫 해인 1993년 8월 12일 ‘대통령긴급재정경제명령 16호’를 발동한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담화문에서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지 않고는 이 땅의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고,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을 근원적으로 단절할 수 없다”고 실시 배경을 설명했다.

김영삼 정부 집권 초반기는 세계 경제의 큰 흐름이 바뀐 시기였다. 앞서 1992년에는 초대형 지역무역협정(RTA)인 ‘유럽연합(EU)’이 탄생했고, 1994년에는 또 다른 RTA인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가 체결됐다.

이듬해인 1995년에는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체제에서 한 단계 발전한 다자간 무역기구인 ‘세계무역기구(WTO)’가 발족됐다. 경제 패권을 잡기 위한 해외 국가들의 이해관계로 인해 본격적인 다자간, 양자간 통상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린 시기다.

김 전 대통령은 이러한 흐름에 한국이 뒤처지지 않도록 ‘세계화 전략’을 제시하고, 빠른 경제 성장과 시장개방을 추진했다. 이에 따라 1996년 12월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는 성과를 이뤘다.

또한 호황기를 누리고 있는 경제에 더욱 탄력을 받도록 하기 위해 민간 부문의 발목을 잡고 있던 정부의 규제를 대폭 개혁해 기업들의 투자 확대를 유도했다. 이를 통해 김 전 대통령은 1995년 연간 수출 1000억달러 돌파,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 달성이라는 성과를 낳았다.

그러나 김 전 대표의 경제정책의 후유증은 OECD 가입 직후인 1997년부터 나타나게 된다. 한국은 일본의 엔화 약세에 따른 경상수지 적자가 매년 규모가 커졌지만 김영삼 정부는 OECD 가입이라는 대명제에 따라 국민소득을 유지하기 위한 고환율 정책만 고수했다.

경상수지 적자를 시장의 질서에 따라 환율의 변동을 통해 해소하는 정책이 아닌, 수입상품에 대한 규제를 통해 해소하려고 하면서 외환 사정은 위험한 상황으로 몰리게 된다.

결국 1997년 1월, 제계 14위였던 한보그룹 계열사인 한보철강 부도를 시작으로 4월 삼미그룹 부도, 7월 기아자동차 도산 등 대기업들의 사태가 이어졌다. 쌍방울그룹, 해태그룹이 위기를 맞았고 고려증권, 한라그룹 등이 차례로 쓰러졌다.

해외 금융기관의 부채 상환 요구에 외환보유액이 바닥이 나자 김영삼 정부는 1997년 11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지나친 개방화와 산업 확대 및 수출산업 강화, 임금인상, 물가상승, 외화낭비 등 경제적 팽창까지 겹치면서 부실이 터지게 된 것이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사죄했지만 한국사회가 겪어야할 고통은 너무 컸다.

 

박형수 기자 npce@dailycn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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