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70주년 대한민국 정체성 확립 중요

▲ 윤대우 대표이사 겸 편집국장

[소비자경제 칼럼] 1000만 영화 ‘암살’을 보고 난 느낌은 “영화 잘 만들었다”, “항일 독립군들이 목숨 걸었던 이 땅을 지켜야겠다”는 각오라 할까.

피 끓었던 청춘 때와는 달리 영화관을 빠져 나온 지 몇 시간 만에 그 각오가 변질되긴 했지만 ‘암살’은 나라사랑이란 본질적 정체성을 일깨우는 역할을 분명히 했다.

영화 개봉은 타이밍 싸움이라했던가 그런 점에서 최동훈 감독이 광복절을 앞두고 ‘암살’을 제때 개봉하게 만든 것은 광복 70주년의 선물이라 생각한다.

‘암살’ 속에서 가장 뇌리에 남는 것은 마지막 장면이었다.

배신자 염석진(이정재 분)은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 재판에서 자신의 정당성을 항변한다. 그는 웃통을 벗고 흉터투성인 몸을 재판 방청객에게 보인다. 총알이 곳곳에 박힌 그의 몸을 본 방청객들은 염석진의 논리에 수긍을 하고 박수를 보낸다.

염석진은 결국 안옥윤(전지현 분)과 명우(허지원 분)로부터 총알 세례를 받고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영화 속이라 통쾌한 복수가 가능했지만 현실은 어떠했을까.

광복후 친일파 인사들은 자기합리화, 정당성을 명분으로 1949년 반민특위에서 빠져나와 혼란했던 대한민국 정부 요직에 속속 기용됐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7,000여 명의 친일파 리스트를 작성하고, 친일파 체포 준비에 들어갔다. 특위는 먼저 친일 재벌 박흥식을 체포함으로써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지만 미군정과 이승만 대통령 반대에 부딪혀 활동이 제대로 되질 않았다.

1년 남짓한 조사기간 동안 특위의 취급건수 682건 중 기소 221건, 재판부의 판결건수 40건으로, 체형(體刑)은 고작 14명에 그쳤다. 실제 사형집행은 1명도 없었으며, 체형을 받은 사람들도 곧바로 풀려났다.

그리고 살아남은 친일파들은 반공을 앞세우며 6.25 전쟁 기간 북한군 소탕에 앞장선다. 휴전후 정부는 이들을 영웅으로 칭송하고 친일 행적은 그대로 덮어둔다. 그들의 후대는 선대가 이룬 권력과 재력을 바탕으로 순탄한 삶을 이어갔다.

반면 독립군은 3대가 망한다는 속설이 증명됐다. 한 언론사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와 후손들 모임인 광복회 회원 6,831명 전원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독립유공자 가족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월 100만원 이상 200만원 미만이 43.0%로 가장 많았고, 50만원 이상 100만원 미만이 20.9%, 심지어 50만원 미만도 10.3%였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치부가 실제로 확인된 것이다.

민족 반역자들은 호의호식(好衣好食)하고 나라를 위해 목숨바친 독립군 후대들은 쪽방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어찌 이치에 맞지 않고 상식에서 벗어난 일이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친일 청산을 주도하려 했던 반민특위가 당시 지지부진 했던 이유 중 하나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태도 때문이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의 활동을 비난하는 담화를 여러 차례 발표했다. 더욱이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 반민특위의 활동을 불법시하고 친일파를 적극 옹호했다. 이승만의 태도는 결국 친일 세력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나아가 이들이 한국의 지배세력으로 군림하게 됐다.

이승만은 항일운동으로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고 미국, 소련을 비롯해 전세계를 돌면서 독립운동을 했다. 이랬던 그가 왜 반민특위를 무력화하는데 앞장 섰을까?

가장 큰 이유는 지지기반 때문이었다. 상해 임시정부 출신이 아닌 이승만은 귀국후 자신의 지지기반을 만드는 게 급선무였다. 마침 친일청산으로 목숨이 위태로웠던 친일파들은 이승만 밑으로 들어가 그를 적극 돕는다. 해방후 3~4년간 자신을 도왔던 친일파들이 청산되려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불안했다.

그가 단순히 권력욕에 눈이 멀어 친일파 청산을 주저 했다는 분석도 있지만 일각에서는 이승만이 친일파 청산보다 스탈린식 공산주의 척결이 더 시급했다고 생각했다는 분석도 있다.

어찌되었건 우리는 광복 70주년을 맞았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불과 100년 사이 일제시대와 6.25 전쟁으로 쑥대밭이 됐던 우리나라가 오늘날 경제, 외교, 스포츠, 군사,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세계 10위권으로 성장한 것은 혼란했던 시기의 강력한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이러한 주장을 근거로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최근 “이승만 대통령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려다보니 자기모순에 빠졌다. 당시 권위주의 대신 민주주의로만 나라를 운영했다면 우리 체제는 벌써 박살 났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반면 젊은 대학생들은 “해방후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한 공로는 인정 하지만 부정 선거와 개인 안위를 위해 다수를 희생한 독재자이기도 했다”고 항변한다.

모두가 부정할 수 없는 맞는 말이다.

문제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정권에 따라 수시로 바뀌고 있다는 데 있다. 이승만은 때론 역적 되기도 하고 위인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기성세대는 늘 국가에 대한 혼란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 또한 대한민국 근간에 대한 의심이 겹겹이 쌓여있다.

나라의 정체성이란 민족의 근간 뿌리다. 변하지 아니하는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성질. 또는 그 성질을 가진 독립적 존재다. 역대 대통령을 들었다 놨다하는 시대에선 정체성은 늘 혼란 할 수밖에 없다.

이승만을 포용 못하고 매번 역사 앞에 단죄한다면 앞으로 100년 향후 1000년이 지나도 우리국민들 정체성에 혼란을 야기할 것이다.

작은 나라 싱가포르조차 철권통치 리더 리콴유를 건국의 아버지로 온 국민이 칭송하는 것을 보면 부럽기까지 하다.

광복 70주년 복잡해질 대로 복잡한 우리나라가 한층 성숙한 국가로 발전하기 위해선 초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양보와 포용이 절실하다.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대표이사 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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