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뉴스에 부쩍 많이 나오는 말이 ‘불찰’이라는 단어다. 불찰(不察)은 국어사전에 의하면 ‘조심해서 잘 살피지 아니한 탓으로 생긴 잘못’이다. 우리가 뭘 본다고 할 때 쓰는 한자에는 찰(察), 시(視), 시(示) 관(觀), 람(覽), 견(見) 등이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찰(察)’이다. 찰(察)은 그 어원이 제사를 지내기에 앞서 빠진 것이 없는지 두루 살펴본다는 의미다. 영어로는 investigate. notice 쯤으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찰(察)은 갑의 언어다. 높은 사람이 갑의 시각으로 잘잘못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이다. 또 타자화의 언어다. ‘찰’은 주체에서 나를 한 발짝 물러서게 함으로써 나를 배제하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제 잘못입니다”와 “제 불찰입니다”는 구분하여 사용해야 한다.

그러므로 ‘불찰’은 다스리는 조직이나 범위가 광범하여 부하의 잘못을 간접 연대 책임질 때 적절한 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요즈음 같은 수평소통, 평등 개념의 보편화 시대에는 지도자가 함부로 사용하면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소지도 있다. 지도자는 말 사용 전에 먼저 그 말뜻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고 가려 사용해야 한다. 필요한 경우 사전 등을 통해 어원까지도 살펴보고 사용해야 듣는 상대의 오해가 없을 것이다.

말은 생각의 외출이다. 말하는 사람 내면의 나들이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야 한다. 외출할 때 잠옷 바람으로 나갈 수는 없다. 세수하고 화장하고 옷매무새 고치는 약간의 성의가 필요하다. 사람에 따라 다소 화려할 수도, 고리타분할 수도, 촌스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지저분하지는 않아야 하고 적어도 혐오감은 주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요즈음 선거철 나들이하는 대선후보들과 그 추종자들의 옷을 보면 지저분하게 입고 나오는 이도 있고, 상대에게 뒤집어씌우기 위해 오물을 준비하여 나오는 이들도 있다. 일부 정치인 언어는 시정잡배 언어인지 국민을 의식하는 큰 정치인의 언어인지 구분이 안 된다. 품격은 차치하고 자질 부족 언어들이 난무하고 있다.

과거 정치인들의 경우,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행동은 다르게 하는 언행불일치가 문제였다면, 지금은 여기에 한 술 더 떠 말도 거칠고 듣기에도 민망한 말들이 오간다. 수단 방법에 제한이 없는 권력을 향한 ‘무한도전’의 아수라장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로마 검투사를 다룬 영화 ‘글래디 에이트’(감독 리틀리 스콧, 2000년)를 연상시킨다. 둘 중 한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끝나는 진흙탕 싸움이다 보니 지켜보는 관중을 살필 겨를이 없다.

지금의 선거전도 이와 비슷하다. 그들만의 게임에서 국민들은 안중에 없다. 국민을 위한 대선인데 국민은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국민의 선거권은 오직 권력을 잡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신문 방송 언론도 한몫 거들고 있다. 예컨대 큰 활자로 찍힌 ‘여론몰이’, ‘◌◌지역 공략’ 등의 헤드라인을 보면, 토끼몰이가 연상되어 불쾌한 느낌마저 든다. 내가 마치 토끼가 되어 이 골짜기 저 골짜기로 ‘몰이’ 당하고 있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 한마디로 언론, 정치인 모두 국민에 대한 예의를 상실하고 있다.

인간이 언어를 구사하면서 시작된 시(詩)와 그 시에 녹아있는 메타포(은유/隱喩)에 대중들이 감동받고 열광하는 이유 중 하나는 거기에 도달하기까지의 수많은 사고의 축적과 압축된 언어의 밀도를 가늠할 수 있기에 그렇다. 그런 점에서 시(詩)는 차원을 달리하는 언어의 예술이다. 단순한 언어의 치장이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고 숙성과 정제 과정을 거치는 고도의 철학적 산물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정치권력 쟁탈전에서 이런 우아한 시나 메타포(은유)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널리 알려진 영화 대부‘The Godfather’, 미국, 1977)의 명대사들을 떠올려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마피아 조직들의 치열한 이권다툼과 사활을 건 긴장 속에서도 명대사와 메타포는 분명 존재했다. 메마른 정치 현실이라고 시나 메타포가 존재하기 힘들다고 변명한다면, 과거도 지금도 많은 정치인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국민의 종복’이라는 말은 취소하고 차라리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라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본인 몸에 달려있고 뚫려있으니 함부로 말해도 되는 게 ‘입의 자유’ 언론의 자유라고 착각하는 이가 간혹 있다. 그러나 인간(人間)은 간(間)에 살고 있는 동물이고 간(間)에 한정된 자유를 누려야 한다. 국어사전에는 인간을 ‘일정한 자격이나 품격 등을 갖춘 이’로 규정하고 있다. 그 ‘품격’에서 품(品) 자는 3개의 口(입 구) 자라는 물건이 가지런히 정돈된 모습이다. 개는 ‘멍멍’이라는 소리의 단품으로 짖어대지만, 복잡 다양한 인간의 말은 정제되고 절제되어야만 품격 있는 소통으로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다.

지금 우리들 앞에 펼쳐지고 있는 선거전은 물고 물어뜯기는 동물의 세계 ‘이전투구’ 중계방송을 방불케 한다. 우리는 지금 눈치 빠르고 영리한 보스나 힘이 센 두목을 뽑으려는 게 아니다. 품격 있고 존경받는 지도자를 뽑고 싶은 것이다. 선거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도 중요하다. 인간적이고,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선거가 되기를 기대한다.

글: 최송목 『사장으로 견딘다는 것』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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