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든 국가든 조직 내에는 크게 세 가지 부류의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믿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이다. 이 세 가지를 모두 충족시켜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있다 해도 조직 전체를 이런 사람들로만 채울 수 없는 게 현실이다. 믿는 사람이지만 능력이 떨어질 수 있고, 능력은 못 미치지만 믿을만한 사람도 있고, 능력은 인정하지만 믿음은 가지 않거나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의 경우다.

믿는 사람, 능력 있는 사람, 좋아하는 사람 중 누구를 선택하는 것이 최선일까? 회사 인사의 경우 나름대로 선정 기준을 가지고 있지만, 이미 조직 내에서 활동해 온 기존 직원들 중 승진, 이동, 요직 배치해야 할 경우 흔히 봉착하는 딜레마다. 신입 직원을 뽑을 때는 주로 능력 위주로 선발하지만, 같이 근무하면서 능력 검증은 물론 신뢰가 생기고 호불호도 누적되어 이런 고민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때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하기보다는 능력자를 중용하고 그를 주시하는 것이 유능한 경영자의 덕목이다. 당연히 내키지 않은 선택이 될 것이고 미안한 마음이 있을 것이다.

능력 유무로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이성적 기준이라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호불호의 선택은 감정적 기준이라 할 수 있다. 믿고 신뢰하는 문제는 이성과 감정이 혼성된 중간쯤 될 것 같다. 흔히 사람들은 당연히 냉정한 비즈니스 세계에서 이성적 판단을 주로 하리라 기대하겠지만, 의외로 많은 경우 호불호의 감정적 기준으로 사람을 선택하곤 한다.

리더의 가장 중요한 일이 이런 세 종류의 사람들을 이성적으로 균형감각의 판단으로 각 기능에 맞게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시키는 일이다. 예컨대 믿을 만한 사람은 창고지기나 수행비서, 금전 출납 등의 일을 맡기고, 믿음은 덜 가지만 능력 있는 사람은 시스템적인 일, 전문분야에 배치시킨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호불호 판단은 가능한 배제하려고 노력한다.

[그림=최송목]
[그림=최송목]

그런데 이런 명백한 판단 기준의 경우를 넘어 좀 더 중요하고 복잡한 관리 업무를 맡길 때 고민이 생긴다. 예컨대 회사 조직의 핵심인 이사진 구성 같은 경우다. 이사는 능력도 있어야 하고 믿을 수도 있어야 한다. 그런데 능력은 되는데 믿을 수 없는 사람, 믿을 수는 있지만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 둘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면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이름만 올리는 간단한 문제로 치부되어 얼렁뚱땅 처리하다가 곤욕을 치르는 일이 중소기업에서는 의외로 많이 발생한다. 특히 조직이 급성장할 경우 지금까지 동고동락하고 같이 일해 온 직원인데 믿음은 가지만, 이미 성장해 버린 조직을 감당할 능력이 안 되는 직원을 이사진으로 계속 끌고 갈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유능한 인재를 영입 등재할 것인지의 고민에 봉착하는 것이다.

이때 많은 중소기업의 경우 좋아하는 사람 내지는 믿을 만한 사람을 선호한다. 업무차질은 어느 정도 견딜 수 있지만, 배신으로 인한 고통은 참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과연 이게 최선의 선택이 될 수 있을까?

그동안의 의리와 신뢰에 대한 보답차원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조직의 미래에는 분명 문제가 생긴다. “저렇게 무능한데 어떻게 이사까지 승진했지?”, “창업 멤버잖아, 회장님과 입사 동기래” 끝까지 의리와 신뢰를 고집하는 리더들이 가끔 있다. 그래서 결국 젊고 유능한 직원의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신뢰만 강조하고 능력은 뒷전인 꼰대 문화가 형성되는 기초가 된다.

신뢰와 의리로 뭉친 ‘좋아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이런 조직은 각종 인맥과 아부가 판치는 조직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신뢰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조직의 활력이 떨어지고, 능력을 너무 강조하면 조직이 건조해진다. 신뢰와 능력은 적당히 배합되어야 한다. 어떤 때는 신뢰가 필요하고 어떤 때는 능력이 필요한 게 조직운용이다. 물론 선택의 타이밍도 중요하다.

다음 달이면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 누구를 뽑는 게 좋을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좋을까? 능력 있는 사람이 좋을까? 아니면, 고향도 같고 학교도 같고 인상도 ‘좋아 보이는 사람’이 좋을까?

그런데, 일반조직에서 인재 선발과 정치판 대선후보 선택에서 중요한 차이점이 하나 있다. 회사에서 뽑은 직원은 잘못 뽑아도 사장이 통제가 가능하다. 하지만, 정치 지도자는 내가 뽑지만 내가 통제 불가능한 영역에서 활동하고 교체도 거의 힘들다는 점이다. 통제 불능의 ‘코뿔소’ 선택이랄까?

우리가 선출하기는 하지만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움직이는 거대한 권력자’가 지금의 대통령이라는 자리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울타리(시스템이나 법)를 넘지 않으면서 범위 내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 입맛에 딱 맞는 그런 사람이 과연 있을까? 유감이지만 가족 중에서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선택하는 문제는 항상 차선일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 선택의 괴로움이 있다. 이번 선거에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의 기준이 아니라, 능력이 ‘더’있어 보이는 사람, 믿음이 ‘더’가는 사람의 기준으로 선택해야 하는 이유다. 지난 수 십 년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자칫하면 이번에도 또 색깔만 바뀐 ‘코뿔소’를 뽑아놓고 그를 염려하는 국민이 될지 모른다.

글: 최송목 『사장으로 견딘다는 것』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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