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란 무엇인가? 영어에는 없는 단어다. 영어로는 ‘wits’, ‘sense’ 혹은 ‘taking a hint’ 등으로 번역할 수 있겠지만, 그 어감을 온전히 전달하기엔 뭔가 아쉬운 구석이 있다. 우리 국어사전에는 ‘남의 마음을 그때그때 상황으로 미루어 알아내는 것’으로 풀이되어 있다. ‘눈치의 힘’ 저자 유니 홍(한국계 미국인 작가)은 눈치가 본질적으로 ‘눈으로 가늠하다(eye measure)’는 의미로서 조화, 신뢰의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타인의 생각과 느낌을 가늠하는 미묘한 기술이라고 했다. 결국 ‘눈치’는 한국인만의 독특한 단어다.

눈치는 대인 관계, 사회생활에서의 감각, 판단력, 이해력, 재치 등을 가리키는데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일의 정황이나 남의 마음 따위를 상황으로부터 미루어 알아내는 힘으로 ‘눈치를 채다, 눈치가 있다/없다. 눈치가 빠르다/늦다’이고, 다른 하나는 생각하는 바가 드러나는 어떤 태도로 ‘눈치를 주다/보다’이다. 또 눈치의 대상에 따라 자식 눈치, 부모 눈치, 시어머니 눈치, 학생 눈치, 교수 눈치, 팀장 눈치, 사장 눈치, 직원 눈치, 노조 눈치, 정부 눈치 등 주체에 따라 다양하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다. 가능은 하겠지만, ‘로빈슨 크루소’처럼 되면 외롭고 재미없다. 인간들 사이에 산다는 건 욕망 사이에 산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피곤한 일이지만, 한편으로 잘 헤집고 나가기만 하면 즐겁고 재미있는 삶이기도 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또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번역함)라고 말한 건 인간이 본성적으로 공동체를 구성하여 살아가는 동물이라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말일 것이다.

[그림=최송목]
[그림=최송목]

나는 가끔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TV 프로그램(‘나는 자연인이다’ 등)을 본다. 스토리는 대개 한결같다. 실패 또는 인간관계에 염증을 느껴 인적 드문 산속 생활을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 한때 나도 그리 해보고 싶었고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래도 힘 있을 때 까지는 부대끼며 여럿이 같이 사는 게 좋다. 이웃 ‘눈치’ 보면서 말이다. 우리 문화에서 눈치가 발달된 가장 큰 이유는 인구밀도일 것이다. 좁은 사람들 밀도 사이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한’ 의식, 생각, 태도, 움직임이 눈치로 정착된 것이다.

중앙대 심리학과 김상진 명예교수에 의하면, 현대백화점이 우수한 실적으로 ‘에이스 매니저’로 선정된 매장 운영자 29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35.5%는 “고객이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 눈빛만 봐도 물건을 살지 둘러보기만 할지 구분할 수 있다”라고 답했다. 즉, 눈치는 불필요한 소통을 생략해주고 나아가 불필요한 절차나 행위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으니 조직 운용자 측면에서는 비용을 줄여주는 효과도 있다.

일반적으로 ‘눈치’는 부정적 의미가 짙다. ‘약삭빠르다. 알아서 긴다’의 의미로 쓰일 때 약삭빠른 아첨꾼, 나아가 부정부패의 매개 수단으로 활용되기 때문이다. 잘못된 ‘눈치’의 오용 또는 악용이다. 이 경우 부하의 과도한 눈치는 조직을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하거나 리더의 잘못된 판단을 더 가속 악화시키기도 한다.

지금까지 눈치는 주로 을의 독점 언어로 존재해 왔다. 약자(을)가 살아남기 위하여 강자 갑의 눈치를 본다거나 서바이벌을 위한 생존의 도구로써 태도와 언어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 부정적인 단어로 인식되어 온 것도 사실이다. 역으로 강자에게는 조직 지배의 도구로 쓰여 왔다. 적당히 반발하지 않는 선에서 조정 조율하는 차원의 ‘을 눈치’ 보기다. 한마디로 지금까지 갑에게 ‘눈치’는 무시해도 되는 상대방의 몸짓 또는 언어에 불과했다.

하지만, 최근 MZ세대를 중심으로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 을의 ‘눈치’ 주기가 서서히 집단화· 유행화되면서 갑을 압박하는 무기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강자 갑도 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로 세상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향후 갑을이 서로 눈치를 보는 ‘눈치의 수렴’ 과정이 전개 지속될 것이다.

[그림=최송목]
[그림=최송목]

눈치는 소통과 타협을 위한 본능적이고 적극적인 촉이라 할 수 있다. 서로를 헤아리고 그 이해를 기반으로 ‘따르거나 이끌거나’하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조정의 소통 핵심 도구다. 을은 재빨리 리더의 마음을 읽고 그의 다음 행보를 미리 알고 움직여야 생존이 가능하다. 반면 갑은 직원이나 조직원, 민중들이 원하는 방향과 마음을 잘 읽고 흐름을 따라 이끌어 가야 한다.

개인 간 인간관계에서 눈치가 없으면 개인적 차원에 그치지만, 집단의 리더나 정치 사회 지도자들이 눈치가 없으면 다수의 대중이 힘들어진다. 일방의 독주다. 역으로 지도자가 눈치가 너무 빠르면 포퓰리즘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배가 산으로 간다.

이래저래 ‘눈치’는 잘 다루어야 할 태도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세상 흐름은 항상 이론대로 순리대로 흐르지 않는다. 요즈음 정치판이나 이해집단, 회사 조직을 보면 ‘눈치’를 마구 함부로 다루는 경향이 있다. 눈치가 없거나 외면하거나, 너무 눈치를 보거나 한다. 과유불급이다. 넘쳐나도 모자라도 자칫 부작용 심한 게 ‘눈치’라는 도구다. 눈치의 재발견이 필요한 시대다.

: 최송목 사장으로 견딘다는 것저자

저작권자 © 소비자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