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이라는 단어는 사랑만큼이나 자주 드라마, 영화, 소설, 노래의 단골 소재로 등장한다. 우리 일상생활의 인간관계에서 흔하게 쓰이고 널린 게 배신이다. 그래서 우리는 살면서 한두 번쯤 배신을 겪는다. 그런데 주변에 배신당한 사람은 많은데 자기가 배신했다고 하는 사람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배신이라는 말은 자기중심적 단어다.

배신이란 과연 무엇인가? 누구나 배신을 이야기하지만, 막상 배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다. 개념이 명확한 것 같으면서도 깊이 들어가면 모호한 구석이 있다. 조폭 세계나 비즈니스에서 배신은 그나마 개념이 명확하게 다가온다. 아마도 생사 흥망이 달렸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사회, 국가, 이데올로기, 정치와 얽혀 담론화되면 모호해지는 경향이 있다.

대체로 ‘배신’은 주어에 따라 여부가 갈린다. 누구를 중심으로 하는 누구의 배신인가이다. 드라마에서 흔히 나오는 ‘나는 항상 네 편이야’라는 말은 무한 신뢰의 말이지만 한편으로 비논리적 비이성적 편 가르기의 단어다. 이때 수혜자 한쪽은 무한 편안하지만, 반대편 한쪽은 무한 불편하다.

배신은 배신당하거나 배신하는 일방이 아니라 때로는 동전의 양면처럼 동시에 존재하기도 한다. 이쪽에서 보면 충성이지만 저쪽에서 보면 배신이다. 가족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국가에는 불충인 경우도 있고, 조직에는 손해지만 상사 개인에게는 이득인 경우도 있다. 보는 관점에 따라 안경 색깔 따라 충성이 되기도 하고 배신이 되기도 한다. 시차의 타이밍 따라 시대정신 따라 다를 수 있다. 대체로 이익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배신은 소속 이탈자에게 씌우는 일종의 낙인이 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 고향, 동문, 동창, 동기라는 이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배신자라는 낙인을 씌운다. 울타리를 굳건히 하려는 조직의 이기적 속성이 작용한 결과다. 그래서 의리와 배신의 이분법은 상대를 나의 울타리에 묶어두는 훌륭한 비즈니스 지렛대로 활용되기도 한다. 과거 기업인들이 정관계 로비에서 흔하게 주고받았던 그 의리와 배신이다.

한편, 고향, 동문, 동창, 동기라는 작은 울타리에서 민족, 국가, 인류, 이데올로기로 넓혀 가면 의리의 영역이 확장된다. 장학회, 후원회라는 선한 이름의 간판으로 위장하고 옭아매면 개념이 왜곡된다. 힘 있는 갑이 의도적으로 기획하고 힘없는 을에게 충성이 강제된다면 그것은 굴레다. 영악한 갑은 굴레를 뒤집어 씌우려 하고 어수룩한 을은 굴레인 줄도 모르고 찾아들었다가 화들짝 놀라 빠져나가기도 한다. 어쩔 수 없이 씌어 진 굴레도 있지만, 결핍이나 욕망에 따라 의도적으로 찾아가는 굴레도 있다.

이처럼 의리와 배신의 이분법은 지속해서 상대를 묶어두는 올가미로써, 효율로 치면 이만한 게 없다. 정관계는 물론 재계, 학계 등 특정 분야 가릴 것 없이 광범위하다. 특히 옛 정치역사에서는 노골적이었다. 루이 14세의 "짐은 곧 국가다." 그리고 영화<효자동 이발사>에서 이발사 성한모(송강호 분)가 복창했던 "각하는 곧 국가다."라는 그 ‘국가’와 지도자를 향한 충성 강요는 이런 이분법의 전형적 모델이라 할 것이다. 이때 대척점이 ‘배신’이다. 배신은 대체로 강자의 언어다. 감정과 융합되면 분노가 되고 폭력이 될 수 있다.

큰 역사도 반복하지만, 우리 일상과 연결된 개인 관계도 반복한다. 과거 신문 지면을 떠들썩하게 채웠던 수많은 배신과 지금 정가에서 회자하고 있는 배신도 반복된 그 복제 유사품이다. 그 속성은 조폭의 그것과 흡사하다. 국가나 법보다 왕이나 ‘우리 대통령’, ‘우리 장관’, ‘우리 의원님’이 우선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법 앞에서, 국민 앞에서 ‘우리 보스’, ‘우리 주군’이 우선시되는 세상은 조폭 세계와 다를 바 없다.

벌거숭이 임금님은 이솝의 우화 속에만 있지 않다. 이야기 밖 현실에도 존재한다. 스포츠 경기가 치열해져 승부에 몰입하면 승리만 보이고 경기의 본질은 점차 멀어진다. 왜 이 경기를 하고 있는지, 경기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망각한다. 경기와 승리의 목적, 본질은 관중이다. 모든 경기는 관중이 없으면 존재가치가 없다.

스포츠에서 관중이 주인이라면 정치에서는 국민이 주인이다. 최근 정치권에서 몇몇 정치인들이 상대의 ‘배신’을 들먹이면서 흥행을 북돋우고 있다. 단어가 직설적이라 느낌이 확 와닿는다. 하지만 선거 승리를 위해 집어 든 그 배신의 주어가 과연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휘둘러야 한다. 그가 속한 집단인지 그의 주군인지 진짜 주인인 관중(국민)인지를 말이다. 누구나 쉽게 내지를 수 있는 그 ‘배신’이라는 말은 개인 간이라면 모르겠지만, 국가 경영에서 큰 정치를 담아낼 그릇의 단어로는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한마디로 작고 위험한 단어다.

글 : 최송목 『사장으로 견딘다는 것』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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