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과거 사장이었을 때, 스스로 평가하기를 직원들에게 엄청나게 잘 대해주는 ‘좋은’ 사장인 줄 알았다. 한참 세월이 흐르고 난 후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지금은 호형호제하는 옛 직원에게 술자리에서 기대 반 호기심 반 궁금하여 물어봤다.

“그때 내가 어땠나? 힘들었지? 많이 까다로왔지?” 그래도 다소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고 물었다. 그가 대답하는 데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네, 그랬지요….” 짤막한 즉답. 그리고 이어 “사장님들이 다 그렇죠. 뭐…”라고 중얼거렸다. 내 잘못만은 아니라는 건가? 내 딴에는 좋은 사장 역할을 했다고 생각했었는데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갑은 역시 갑이라는 거다. 순전히 나 혼자만의 착각이다.

아무리 마음씨 좋고 인품을 지닌 사장이라도 사장은 ‘사장질’을 하나 보다. 대다수 사장 본인들은 부정할 테지만 ‘갑’이니 ‘갑’의 행태가 몸에 익숙해져 저절로 갑질을 하게 되어 있다. 그가 겸손하던, 소탈하던, 동네 아저씨같이 수더분하게 보이던, 어쨌든 사장은 ‘사장질’ 한다. 몸에 익은 갑질이다.

최근 이런 사장의 갑질을 소재로 한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인기 TV 프로그램이 있다. 일상 관찰을 통해 사장과 직원들의 관계를 살펴보고 과연 사장들이 직장에서 어떻게 자신도 모르는 갑질을 하는지를 보고 자아 성찰을 끌어내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에는 관찰대상인 사장이 있고 이를 관찰하는 관찰자와 MC가 있어 재미있고 유익하게 이야기가 전개된다.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다소 무리하게 설정된 부분이 있긴 하지만 재밌는 웃음 속에 교훈도 있고 성찰도 있다.

하지만 현실 사장의 세계에서는 TV프로그램 같은 관찰자의 날카로운 지적과 성찰의 기회는 존재하기 힘들다. 피라미드 조직의 최상단에 있는 사장에게 함부로 지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직장 내 우리는 구조적으로 매일의 사소한 갑질 상황에 둘러싸여 있다. 그 대부분은 의도되지 않거나 악의는 없지만, 직원 입장에서는 아픈 갑질들이다.

예컨대, 사장은 외부 비즈니스 약속은 칼같이 잘 지키면서 사내 직원과의 약속이나 시간은 언제나 고무줄처럼 최하순위로 한다. 10분은 다반사고, 1시간 연기하기도 하고 오전 회의가 오후가 되기도 하고 내일 또는 아예 취소되기도 한다. 직원 입장에서는 사장과의 약속이니 모든 일정에서 최우선으로 비워둔 건데, 사장은 너무 간단하고 쉽게 말 한마디로 끝내곤 한다.

이때 아무도 사장에게 “왜?”라고 따져 묻지 않는다. “우리 사장님은 늘 바쁜 분이고 나와의 약속보다는 다른 약속이 더 중요하니까”로 이해한다. 일종의 포기와 복종이 뭉뚱그려진 순응이다. 조직에서 이런 순응이 반복되다 보면 갑은 갑대로 을은 을대로 습관으로 자리 잡히고 자연스러운 조직문화가 되는 것이다.

사장을 비롯한 리더들의 이런 행동 원인은 피라미드 구조의 정점인 갑의 위치에서 비롯된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선 원숭이는 거인을 자기가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리더의 갑질과 팀원의 순응이 장기화하면 조직은 외길로 들어서게 된다. 선장과 선원의 집단지성이 아니라 선장 개인의 아집과 편견에 의해 기울어진 채로 항해를 하는 배처럼 되는 것이다.

세상은 아무렇게나 던져지는 무작위 주사위 판처럼 보이지만 나름 방향성을 유지하고 있다. 미세하게는 카오스지만 거시적으로는 규칙과 방향을 유지하는 프랙탈처럼 세상도 그렇게 움직인다. 요즈음 갑질 논란, 평등, 공정, 수평 문화, 소통 등으로 일방에서 쌍방으로의 사회적 분위기가 많이 변하고 있다. 집단지성의 큰 흐름이 바뀌고 있다. 갑이든 을이든 리더든 직원이든 집단지성의 거대한 흐름 위에 얹힌 나뭇잎에 불과하다. 선장 혼자 고집 피우다가는 배가 언제 침몰할지 모른다. 큰 흐름이 흔들리면 리더도 조직의 생존을 위해 시대적 파도를 타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때 리더가 배의 침몰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 하나다. 스스로 거울을 보는 것이다. 아무도 리더의 귀가 정말 당나귀 귀인지를 말해주는 이가 없으니 스스로 살펴봐야 한다. 하지만 돈 많고 권세가 높아질수록 거울 보는 횟수도 잦아져야 할텐데, 현실에서는 정반대로 점점 뜸해진다. 이에 대해 역사는 단호하다. 리더를 바꿔가면서 흐름을 이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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