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매체에서 경연(배틀)대회가 유행이다. ‘미스트롯’으로 송가인이 세상으로 나왔고, ‘미스터 트롯’으로 임영웅이 탄생했다. 힙합 서바이벌 프로그램 쇼미더머니도 회를 거듭하고 있고 성공작들을 모방한 경연들이 줄을 잇고 있다. 그만큼 경연이 인기가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내가 가장 궁금하게 여겼던 부분은 다들 잘하는 것 같은데 그 우열을 어떻게 구별하는가였다. 심판 역할을 하는 심사위원들의 판단능력에 관해서다. 나의 보통 귀로는 도저히 누가 더 잘 부르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의 평을 듣고 있노라면 바로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역시 전문가들의 귀는 정확하고 논리도 정연하다.

전문가란 잘하는 것과 더 잘하는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일반인도 못 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안다.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 잘 부르는 것과 못 부르는 것도 구별할 수 있다. 하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그 다음엔 모른다.

전문가란 미묘한 차이를 구분하는 사람이다. 남들은 그저 좋다고 하는데 그는 미주알고주알 디테일을 구분하는 것이다. 예컨대 와인이 그렇다. 사실 나는 와인을 모른다. 고상한 자리에서 무식하다는 소리 들을까 봐 전문가라는 분들에게서 몇 가지 들은 풍월에도 불구하고 단맛, 쓴맛, 떫은맛 정도만 알아차릴 뿐, 칠레산이지 프랑스산인지 오래 숙성된 와인인지 올해 바로 나온 와인인지 알 수 없다. 마실수록 취기만 오른다.

그런데 나에게 사과를 가져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만져 볼 필요도 없다. 딱 보면 한눈에 안다. 방금 딴 사과인지, 몇 달을 창고에서 묵혀 나온 건지, 껍질이 두꺼운지 앏은지, 단단한지 허벅허벅한지, 단맛인지 신맛인지 상큼한 맛인지, 알 속에 꿀심이 있는지 없는지, 육즙이 풍부한지 텁텁한지, 산지가 산비탈인지 평지인지 등이다. 사과 한 알로 그 맛을 5분 이상 디테일하게 설명할 수 있다. 유년 시절 사과 집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변변한 간식거리 없던 시절이라 아침, 점심, 저녁 온종일 사과만(아마도 20개 이상) 먹어 치운 임상 경험데이터 덕분이다.

그런데, 이런 특별한 능력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다. 전문적이라는 것은 때로 까탈스럽다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을 피곤하게 하고 돈도 들게 한다. 사과에 관한한 절대 미각으로 맛 구별이 거의 수라 상궁 수준이라 일반인들이 맛있어 하거나 좋다고 하는 것에 쉽게 동의하거나 만족할 수 없다. 그래서 절대 아무 사과나 집어 들지 않는다. 남들은 그걸 유별나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소리에 예민한 음악 애호가는 아무 스피커나 이어폰을 쓰지 않는다. 명품 애호가들은 운동복도 아무거나 입지 않고, 손수건도 아무거나 들고 다니지 않는다. 진짜 가짜 구분도 확실하다. 취향이긴 하지만 좋아하거나 즐기다 보니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된 것이다.

일의 영역에서도 전문가는 예민하고 미묘한 부분에서 일반인들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나는 잘 쓴 책, 보고서, 칼럼을 보면 훅 빨려들고 논리가 조금이라도 안 맞거나 흐름이 이상한 보고서는 보자마자 금방 알아챈다. 내가 써놓은 글조차도 가끔 그런 감각 때문에 스스로 짜증 날 때가 있다.

내 전문인 컨설팅 분야도 그렇다. 나는 직업상 업체를 방문하거나 사장님들을 많이 만난다. 통상 회사조직이나 CEO를 파악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지만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간단하고 시간도 그리 많이 걸리지 않는다. 잠깐 방문, 한 두 시간이면 회사의 경영상태, 사장 스타일, 직원 만족도 등 대강의 그림을 그려낼 수 있다. 해결책은 다소 시간이 걸리지만 진단은 단기에 가능하다. 왜 그럴까? 그 방면에만 촉이 쏠려있고 임상경험과 데이터가 축적된 결과다. 사람들은 한 분야에 오래 일하다 보면 남들이 가지지 못하는 특별한 눈과 촉을 달게 된다.

통상 전문가들은 일반인들이 도저히 상상도 못 하는 예리한 눈과 통찰로 사건을 짚어 준다. 그런데 그 전문가가 누군가의 도구가 될 때 정보는 왜곡되고 사회는 혼란에 빠진다. 본인의 정체성도 문제지만 전문가의 말을 믿지 못하는 사회 분위기나 전문능력을 힘의 수단으로만 사용하려는 권력자들이 그리 만드는 것이다. 전문가가 완벽한 정의나 도덕으로 무장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자기의 이론’은 지켜야 한다. 현대판 ‘지록위마’(指鹿爲馬)를 경계하는 것이다. 그게 전문가의 존재 이유다.

나는 요즈음 정치, 법률 전문가가 되지 않은 걸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언론 보도 외 상상할 수 있는 그 많은 권모술수를 헤아리다 보니, 자칫 정의나 존재가치를 잃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저작권자 © 소비자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