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과대학 정원 확대에 반발하는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이 이어진가운데 부산 서구 부산대병원에서 한 환자가 검사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의과대학 정원 확대에 반발하는 전공의들의 집단 사직이 이어진가운데 부산 서구 부산대병원에서 한 환자가 검사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권찬욱 기자
권찬욱 기자

정부의 의사 정원 확대 지침에 반발해 전공의 수천명이 사직서 등을 제출하면서 의료 공백이 가시화되고 있다. 그 여파는 당장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정도다. 환자들은 기껏 잡혀있던 수술이나 시술이 연기되었으며, 외래 진료를 받으려는 환자들도 부족해진 의료인력으로 인해 긴 대기시간이 이어지고 있다. 

아니나다를까, 이번 파업을 보는 여론의 시선은 매우 싸늘하기만 하다. 이는 근본적인 부분에서부터 잘못되고 있기 때문으로, 파업이라는 것은 사회적인 불편을 야기하는 시위의 일종이고, 피해를 보는 국민들의 공감대와 이해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불만이 있다고 우리 요구사항 들어달라고 누구나 파업해서 들어줄 것 같으면 국가와 사회라는 것은 성립이 될 수가 없다. 

일례로 똑같이 지하철·철도의 불편을 야기했던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점거 시위와 전국철도노동조합의 총파업이 어떠했는지 생각해보면 된다. 

먼저 전국철도노동조합의 파업은 SR과의 기형적인 경쟁체제 철폐를 핵심사항으로 들고 나왔으며, 적어도 명분에 대한 지지는 받았다. 게다가 실제로 수서-부산 SRT의 축소로 불편함이 야기 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피부로 느끼는 일부 국민들의 지지도 있었다.

반대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지하철 점거 시위는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며 지하철 차량을 무단으로 점거한 뒤 운행 방해를 일삼았다. 그러나 정작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탈시설 관련 사업 예산이었고, 사람이 많은 시간을 골라 수많은 서울 시민들의 출퇴근길을 방해하면서 장애인에 대한 혐오를 확산시키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무엇보다 의사라는 직업은 생명을 다루며, 그 중함은 ‘히포크라테스 선서’에서도 강조된다. 선서에는 여러 조항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의사는 환자를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것인데, 현재 상황을 보면 전공의들은 ‘환자들은 우리의 파업을 이해해주어야 한다’면서 오히려 환자를 방치하거나 인질로 삼아 요구를 들어달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그 과정에서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이 있는지 조차도 의문이다. 기존 파업들은 공공적 부분들이 훼손당할 우려가 있는 경우 파업의 주체가 되는 집단이 사회에 가해질 충격을 줄이기 위해 자신들이 해당하는 영역에서의 업무에 나서면서 돌아가면서 파업하기도 하고, 때로는 파업 기간 역시 짧게 진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파업에서는 일부 병원에서 의사가 부재중이고, 간호사들이 의사들이 해야하는 일을 대신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오고 있다.

특히 이번 파업은 훼손될 공공적 부분이 단순한 서비스, 산업의 영역이 아니라 ‘사람의 목숨이 달린’ 부분에서 그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의 중함은 이루말할 수가 없다. 정부의 업무개시명령, 구속수사 시사, 의사 자격 박탈 등 단호한 측면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정부는 이번 기회를 통해 정체되어 있던 많은 의료정책을 긍정적으로 바꾸어나갔으면 한다. 간호사들의 처우개선과 PA간호사에 대한 논의라던가, 한의사들도 의사들과 같은 혜택을 받는다거나, 처방전없이 약사에게 처방 받을 수 있는 약품의 범위가 확대된다고 하는 것들 말이다. 이 모든 사항이 의사들의 반대로 정체되어 있던 것들이고, 진통을 겪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파업으로 다시금 조금씩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한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이번 파업에 대해 의견이 다르다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파업 상황은 양쪽 모두 물러설 생각이 없고, 국민들은 ‘이번만큼은 정부를 지지한다’고 까지 할 정도니 어떠한 결과던지 파국은 예정되어 있다. 그간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 파업은 고스란히 그 직업에 대한 부정적 시선과 혐오로 남았다. 이번 혐오는 의사라는 직업을 동경에서 좀 더 객관적이고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만들 것이다.

이는 의사를 지칭하는 별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기존에는 ‘의느님’·‘의룡인’ 등 특별한 위치에 있는 의사들에 대한 동경심에서 오는 별칭이었다면, 파업이 전개되고부터는 ‘의주빈’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이 붙여지고 있다. 과연 모든 일이 끝나고 의사들에 대한 인식은 회복할 수나 있을까. 정말 묵묵히 환자들을 돌보아온 의사들만 안타깝게 됐다. 

소비자경제신문 권찬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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