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장은 직원들이 회사에 충성하기를 원하지만, 직원들은 회사보다는 개인 (직속 상사)에게 충성하고 싶어 한다. 특히 직원 규모가 작은 중소기업일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다. 회사는 망해도 개인은 직장을 옮기면서 살아갈 수 있고, 회사는 소속일 때만 울타리가 되어 주므로 단발성 관계지만, 직속 상사는 회사를 떠나도 끈끈한 연결고리를 유지할 수 있어 장기적 관계다. 흔히 고위 간부들이 타사로 이직할 때 이사, 부장, 과장, 대리가 포도송이처럼 한 그룹이 되어 이탈하는 사례가 있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조직에 충성하기보다는 개인에 충성하는 것이 훨씬 수월하고 현실적으로 이득이 되다 보니 회사보다는 개인끼리 끈끈하게 뭉치는 성향을 이용한 사병화(私兵化) 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충성은 주로 방향성이 위로 향하고 믿음은 위아래 공통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상호 간 상하 간 믿음을 담보로 자발적 충성이 생성되고 나아가 충성을 강요도 하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출신 고향, 학교, 군대, 동기, 동창 등 선후배로 엮는 것을 좋아한다. 인간관계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서로를 공통적인 이야깃거리로 연결하는 것이고 그 단초가 이런 과거의 관계 즉 인연을 소환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학연, 지연 선후배 거들떠보지 않고 소위 원칙대로만 조직 생활을 하는 사람은 ‘융통성이 없다’는 이유로 주위에 배척당하기 쉽고 성공하기도 힘들다. 그래서 웬만한 강단 없이는 국가나 조직에 충성하기보다는 상사 개인(사람)에게 충성하는 길을 택한다. 정치 선동가들이 흔히 부르짖는 ‘나를 따르라’라는 식의 독재가 가능한 것도 이런 인간의 저간 심리를 잘 간파하여 낳은 결과다.

사병의 전형적 사례라 할 수 있는 고려 무신 시대의 최 씨 정권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가나 회사 입장에서도 이런 개인 간의 친밀도 상승이나 사조직화를 근간으로 하는 충성이 장기적으로 회사나 국가의 발전과 지속 성장을 담보하지 않는다. 원만하고 친밀한 인간관계가 일반적으로는 조직 발전에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지만, 지나치게 밀착도가 강해지면 조직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큰 위험 요소로도 작용한다. 조직에서 직무 성격상 개인적 충성을 필수요건으로 하는 경우도 있지만, 필연적으로 ‘충성의 부작용’을 수반한다.

요즈음 정치권, 국가권력 구조에서도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조직이나 시스템에 충실해야 하는데 개인의 인연과 이익에 충실하다 보니 회사나 국가 시스템은 뒷전이다. 특히 선출직 기관장들이나 국회의원들의 선거 공신에 대한 논공행상 인사가 그렇다. 또 대의 민주주의라는 명분으로 국회의원이 탄생했는데, 공천권, 당론이라는 길들이기와 가축화로 독자적인 헌법기관인 개별 국회의원들을 줄 세우고 무력화시키는 것이 충성심 왜곡의 사례라 볼 수 있다. 대의명분은 간판으로만 걸어놓고 개인적인 이익과 당론으로 통제하니 효율적 관리법이기는 하다. 또 개인 입장에서도 당장의 당론과 인연에 충실하는 것이 주판알을 두드려보면 훨씬 수익이나 자리보전에 유리할 것이다.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니 국가에 충성 가능한 제도 개선이 안 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분명 전근대적인 행태이고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국가와 국민에 대한 충성 시스템과는 거리가 먼 듯싶다.

한편, 회사나 국가에 대한 일편단심 충성은 단기적으로 개인의 큰 희생을 초래할 수 있다. 독립운동가 자손들의 생활고, 내부 고발자들의 고충 등을 종합해 보면 그렇다. 정의나 국가 조직의 대의를 선택하는 것은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고난의 길이다. 조직 속에서 연약한 갈대에 불과한 게 개인이고 그래서 다수는 현실적인 안전이나 편안함을 택한다. 대개는 눈만 감고 어려운 판단의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린다. ‘미필적 고의’라는 커다란 그림자 뒤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숨는 것이다.

결국, 조직은 ‘믿음’을 근간으로 충성 집단을 목표로 구성하지만, 그 ‘믿음’을 전적으로 신봉하고 밀도를 높이는데 너무 공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역설이 생긴다. 사상누각이 될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직원을 믿고 일을 맡겨야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의 과정이나 결과는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즉, 충성도는 하는 일의 성과와 비대칭일 수 있다. 따라서 충성의 응고성, 변동성, 방향성, 휘발성 등 속성을 살피고 대비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이 사람을 믿기 시작하면 점점 더 그 믿음을 확대하고 응고시키는 바람에 믿음의 ‘동맥경화’가 일어난다. 종국에는 믿음의 상대를 ‘신격화’하는 경향으로 발전한다. 그의 인격과 능력을 동격화하여 그가 하는 일이라면 콩으로 팥죽을 쑨다 해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 주의하여 잘 살피지 않으면 금방 굳어버리는 충성의 응고성이다. 소위 ‘한 번 믿으면 끝까지 믿는다’는 식의 인사가 부하의 충성을 유도하는 가장 바람직한 모델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한편으로 믿음의 방치에 의한 응고 현상도 발생하고 역이용 등 부작용을 초래할 수도 있다.

두 번째 인간은 정방향 원칙대로 직진하지 않는다. 사람은 이성과 감성의 혼합체로 언제든 균형을 잃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그 균형의 흔들림으로 맥박의 부정맥 같은 불규칙성이 발생한다. 시간, 시대, 장소, 상대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므로 논리나 이념, 감정 등 하나의 고정된 잣대로만 한 사람의 인격체를 규정하기 힘들다. 평소 선(善) 한 사람도 가끔은 궤도를 이탈하여 악(惡) 하게 행동할 수 있고 강한 사람도 때로는 약해질 수 있다. 그러므로 어제의 차돌 같은 충성도 내일은 찰흙같이 물러질 수 있다. 충성의 흔들림, 변동성에 의한 방향성이다. “발걸음을 인도하는 것은 걷는 사람에게 있지 않다.”라는 명언도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지도자는 갈대와 같이 흔들거리는 충성심의 흔들림을 최소화하고 균형을 이루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가꾸어야 한다.

세 번째는 충성의 ‘휘발성’이다. 우리는 순간의 파트너들과 일하고 있는 것이지, 고형화된 인격체와 일하고 있는 게 아니다. 상대도 늘 변하고 나 또한 변한다. 멘탈과 상황의 상대적인 변화를 말한다. 영원하리라 굳게 믿었던 파트너십도 눈앞의 큰 이익이나 불가항력 앞에 무너지는 걸 우리는 수많이 목도해왔다. 태산만큼 높이 쌓였던 믿음도 하루아침에 리셋되어 0이 될 수 있다. 건조하게 말하면, 우리는 순간의 친구이고 파트너다. 다만 긍정적으로 말한다면 그 믿음의 순간을 좀 더 길게 늘여보려는 상호 노력의 여지가 다소 있다는 점일 것이다. 믿음은 큰 금덩어리가 아니라 조각조각 흐트러진 사금(작은 믿음)을 매일 한 조각씩 모으는 과정에서 축적 성장된 결과물이다. 산호초처럼 줄었다 늘었다 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직에서 믿음과 충성은 신에 대한 순도 높은 믿음이나 충성심, 개인 간 1:1의 절대적 믿음과는 다르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조직 내에는 여러 개의 믿음과 충성이 동시에 분포 존재하고 있고 어떤 것은 응고하고 있고 어떤 것은 천천히 휘발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항상 관찰과 주의, 거리감 유지 등 보이지 않는 긴장과 깨어있는 관리가 필요하다. 그게 조직이라는 울타리에서 개인의 자율과 믿음 사이로 충성을 순방향으로 이끌어 내는 태도이고 기업의 장기발전 리더십이다.

지난 대선에서 어느 후보가 ‘사람에 충성하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한 걸 기억한다. 이 말은 그가 ‘을’일 때 한 말이다. 이제 그가 대통령 당선인 ‘갑’이 되었다. 그렇다면 종전의 그 말에 더해 ‘사람에 충성하도록 (강제) 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말도 수용해야 할 것이다. 역지사지를 할 수 있어야 내로남불이 되지 않고 ‘충성’이라는 단어가 완성된다. 슈퍼 갑이 된 그가 과연 공수전환을 통해 그 완성을 이루어 낼 수 있을까? 5년 후를 기대해 본다.

글: 최송목 『사장으로 견딘다는 것』 저자

저작권자 © 소비자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