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기한 표시제’ 도입 급물살…유업계 “관리방안 마련 우선돼야”

소비자기후행동 2050년 탄소중립 실현 위해 ‘소비기한표시제’ 도입 촉구 ​​​​​​​“식품낭비 줄여 기후변화 대응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한 제도”

2021-06-14     노정명 기자

소비자들이 ‘소비기한 표시제’ 도입을 촉구하고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올해 내로 강행할 뜻을 보이면서 유업계가 궁지에 몰리고 있다. 유업계는 소비기한 표시제 도입 이전에 ‘소비기한’에 대한 전국민 홍보와 철저한 유통관리 방안이 우선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14일 (사)소비자기후행동은 가공식품에 유통기한 대신 실제 먹을 수 있는 기한을 의미하는 소비기한을 단독 표기하는 ‘소비기한표시제’ 도입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유통기한’과 ‘소비기한’은 부패한 식품이 판매·섭취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정한 지표다. 유통기한은 ‘판매가 가능한 시점’을, 소비기한은 ‘품질이 떨어졌지만 소비자 건강에 지장 없을 것으로 인정되는 시점’을 의미한다.

소비자기후행동 이차경 상임이사는 “소비기한표시제는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2050년 탄소중립을 달성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한 제도”라면서 “과거와 달리 냉장유통 시스템이 발달해 식품안전 우려가 낮아졌고, 충분히 섭취가 가능한 제품을 유통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폐기·반품해서 발생하는 탄소 발생과 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전국 소비자의 목소리를 대변해 ‘소비기한표시제’가 조속히 도입되길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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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 폐기되는 음식물 쓰레기 570만t에 육박

소비자기후행동에 따르면 2019년 세계농업기구(FAO)가 발표한 한 해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는 13억t, 여기서 배출되는 탄소는 33억t 수준이다. 우리나라도 생활폐기물의 약 30%가 음식물 쓰레기로 한해 음식물쓰레기 발생량이 570만t에 육박한다. 한국보건산업 진흥원에서 발표한 유통기한에 따른 식품 폐기 손실 비용을 보면 생산단계에서 발생하는 폐기비용이 5900억원, 가정 내 폐기 비용이 9500억원으로 한 해 평균 1조 5400억 원이 소요되고 있다.

소비자기후행동은 ▲미국, 유럽, 호주 등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미 소비기한표시제를 도입했다는 점 ▲코로나19와 유례없는 자연재해를 경험한 시민들이 환경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다는 점 ▲이미 많은 시민과 국회의원, 인플루언서들이 소비기한표시제 도입을 찬성하고 있다는 점을 주장하며 소비기한표시제 도입을 위해 조속한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실제 소비기한표시제는 CODEX(국가식품규격위원회)와 유럽, 미국, 호주, 일본, 중국, 필리핀, 케냐 등 여러 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다.

이차경 이사는 “소비자 입장에서는 소비기한이 유통기한보다 식품안전을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음식 낭비를 줄일 수 있기 때문에 소비기한 도입을 촉구하는 것”이라면서 “소비기한표시제는 식품 안전의 한계 시점을 더욱 명확히 알리는 제도이기 때문에 오히려 식품 소비 시점을 고민하는 소비자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고 유통업계 또한 안전을 위해 더욱 철저한 관리 방안을 강구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한 혼란으로 안전사고 발생 시 제조사가 떠안아야”

소비기한 표시제에 가장 민감한 유업계에서는 조심스런 입장이다. 소비자들이 ‘유통기한’과 ‘소비기한’ 등 기한의 혼선으로 제때 우유 폐기하지 못할 경우 안전사고 발생 시 사고의 책임은 제조사가 전적으로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유업계 일각에서는 “소비기한의 시행 이전에 소비기한에 대한 올바른 정보 제공, 적극적인 홍보 등을 통해 소비자들의 인식 변화를 유도하고 ‘우유 및 유제품’ 보관에 대한 철저한 관리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어 “우리나라의 경우 우유를 냉장고에 보관하기 보다는 오픈 매대에 진열해 판매하는 경우가 많아 변질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면서 “마트나 편의점 등 유통업계에서 유제품에 대한 유통 기준이 마련되지 않고 소비기한을 시행할 경우 유제품 변질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유제품에 대한 소비자 불신도 높아질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업계 일각에서는 유통기한과 소비기한을 병행 표기하자는 의견도 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소비기한 표시제를 시행할 경우 유통기한과 혼동할 수 있어 소비자의 피해가 증가할 수 있다”면서 “유통기한과 소비기한을 병행 표기하다가 점점 소비기한으로 통일시키는 점진적 도입도 검토해볼만 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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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유제품 국내시장 장악할 수도” 우려

유업계는 소비기한 도입으로 인해 수입 유제품이 국내 시장을 잠식할 수도 있다는 점도 우려하고 있다. 2026년부터 EU와 미국 수입품에 대한 관세가 철폐되고 2033년에는 낙농 선진국인 호주와 뉴질랜드의 관세가 철폐된다.

그동안 비관세장벽 역할을 했던 유제품의 유통기한 제도가 폐지되면 멸균유가 대부분이고 유통기한이 50여일이 넘는 수입유가 물밀듯이 들어올 수 있다. 즉 소비기한 표시제가 도입될 경우 수입유와의 차별화가 없어져 대량공급체계를 갖춘 선진국과의 경쟁에서 밀릴 수 있다는 것이 업계의 우려다. 

유업계 관계자는 “멸균유보다 상대적으로 살균유가 유통 후 보관이 더 까다롭다. 소비기한 시행은 살균유보다 멸균유 소비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소비기한 표시제도가 도입되면 대부분이 멸균유인 해외우유의 수입이 많아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고 지적했다.

이어 “즉 유통기한을 소비기한으로 표기한다면 수입 규제 완화와 같은 효과를 가져와 수입 우유가 대량 유입될 가능성이 높다”면서 “식품낭비를 줄여 기후변화에 대응하고 환경을 보호한다는 취지에는 동감하나 수입품으로부터 국내 우유업계와 낙농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대안도 마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식약처는 올해 내로 소비기한 표시제에 대한 전문가와 식품·유업계의 의견을 수렴한 후 내년에는 적극 도입하겠다는 입장이다.

소비자경제신문 노정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