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급 실무부터 익히며 차근차근 경영 수업 받은 3세 경영인
자율성 강조, 조직문화 개선, 과감한 세대교체로 혁신 리더십 주도
경영 승계 등 둘러싼 비판적 의견도 적극 귀 기울여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현대차그룹의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수소전기차 넥쏘 앞에서 포즈를 취한 정의선 부회장과, 자율주행 전문기업 오로라 그리스 엄슨 사장 (사진=연합뉴스 제공)
정의선 수석부회장이 현대차그룹의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수소전기차 넥쏘 앞에서 포즈를 취한 정의선 부회장과, 자율주행 전문기업 오로라의 그리스 엄슨 사장 (사진=연합뉴스 제공)

[소비자경제신문 이한 기자] 현대家의 종택이나 다름 없는 정몽구 회장의 청운동 저택은 고(故)정주영 명예회장이 매일 새벽 살아 생전 자녀들을 불러 아침을 함께 먹던 장소로 현대그룹의 상징적인 공간이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은 지난 2000년 3월, 자신의 손으로 직접 지어 38년 동안 살았던 이 저택을 정몽구 회장에게 물려줬다. 이는 ‘왕회장’이 장남에게 집을 물려준 이 장면은, 현대가를 둘러싸고 벌어진 왕자의 난 승패가 사실상 결정된 순간 중 하나로 꼽힌다.

최근 정몽구 회장도 이 저택을 장남에게 증여했다. 그가 바로 지금 현대기아차그룹을 이끌고 있는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이다. 현대기아차그룹의 ‘회장님’은 아직도 부친 정몽구 회장이지만, 재계는 정의선 부회장이 사실상 경영권을 승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정 부회장은 한국에서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현대모비스(당시 현대정공)에 과장으로 입사했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경영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해외에서 일하다 현대자동차 구매실장으로 컴백했고 영업본부 본부장과 기획총괄본부 부본부장, 기아차 대표이사, 현대차 부회장을 역임했다. 일찌감치 그룹 후계자로 결정됐고, 실무부터 익히며 경영수업을 받은 다음 빠르게 승진해 경영진으로 올라선 전형적인 3세 경영인 코스를 밟으면서 현대그룹의 정통 계보를 잇고 있다.

◇ 본부별 자율성 강조한 리더십으로 실적 개선

정 부회장의 경영 성과는 어떨까. 우선 최근 성적표를 보자. 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 2분기실적이 큰 폭으로 개선됐다. 현대차의 2분기 영업이익은 1조 2377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30.2% 증가했다. 같은 기간 기아차 영업이익은 5336억원으로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51.3% 늘었다. 최근 실적 호조에 대해 로이터는 "6년의 실적 감소를 겪은 현대자동차의 부활은 유력한 상속자인 정의선이 이끌었다"고 보도했다.

기업의 성공이나 부진을 오직 CEO 한 명의 영향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경영자의 리더십이 성과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업계에서는 글로벌 권역본부 체제를 도입해 본격화한 효과가 1년 만에 나타난 것으로 평가한다. 실적 부진 흐름을 끊고 ‘V자 반등’을 끌어내기 위한 정의선 부회장의 승부수가 통했다는 분석이다.

현대차는 지역별로 권역본부 체제를 갖췄다. 지난해 말까지 북미·유럽·인도·러시아 등 4개 권역본부 체제를 세웠고 올해 아시아·태평양(아태), 중남미, 아프리카·중동(아중동) 등 3개 본부를 추가했다. 기아차도 기존 북미와 유럽, 러시아 권역본부에 이어 올해 아태, 중남미, 아중동 본부를 만들었다. 과거 본사의 지시에 따라 일괄적으로 움직이던 해외 생산 및 판매법인을 '현장 중심 의사결정체계로 바꿔야 한다'는 정 수석부회장의 주문이었다. ‘제왕적 카리스마’로 유명했던 과거 현대그룹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굉장히 유연한 변화다.

정의선 부회장은 지난해 연말 해외법인장 회의를 주관하면서 “권역본부 중심으로 각 부문과 협업을 강화해 고객에게 새로운 경험과 최상의 가치를 제공하는 기업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정 부회장은 이 자리에서 “권역본부 리더들은 직원들의 자발적 도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액셀러레이터’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역별 자율성을 부여하자 변화가 생겼다. 북미 본부는 미국에서 인기가 높은 SUV 신차 위주 전략을, 인도 본부는 현지 수요를 반영해 소형 SUV를 출시 전략을 수입했다. 현대차와 기아차 모두 판매 대수 감소 속에서도 매출액과 영업이익이 증가한 것은 지역별로 최적화된 전략을 세운 덕이라고 업계에서는 보고 있다.

◇ 조직 문화 바꾸고 과감한 세대교체 주도

정의선 시대를 맞은 현대차그룹이 과거와 어떻게 달라졌는지 짚어보자. 이들은 과거의 관습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다. 정 부회장은 지난 5월 한 행사에 참여해 "현대차그룹의 기업문화는 스타트업처럼 더 많이 변할 것입니다. 우리 문화는 앞으로 더욱 자유로워지고 자율적인 의사결정 문화로 변모할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다.

실제로 현대차그룹은 변하고 있다. 올해 2월 대학졸업자와 졸업예정자 등을 대상으로 한 정기공채를 폐지하고 상시채용 체제로 전환했다. 3월에는 자율복장제도를 도입했다.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확대하고 임원 직급체계도 개편했다. 하반기에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직급체계 추가 간소화도 논의중이다.

현대차 관계자는 "임원 및 직급 체계 개편은 수평적 조직문화 촉진과 우수 인재에 대한 성장 기회 부여를 통해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문화를 정착하겠다는 의지"라고 밝혔다. 세상의 모든 CEO가 직원들에게 능동적으로 일하라고 요구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으라고 주문한다. 하지만 실제 그런 환경을 갖추는 것은 쉽지 않다. 정의선은 현대차그룹을 그렇게 바꾸고 있다.

‘정몽구 사단’에 대한 세대교체도 일부 진행 중이다. 지난해 12월 실시한 인사에서 정몽구 회장의 복심으로 꼽혔던 김용환 부회장이 현대제철로 자리를 옮겼고 오랫동안 현대차를 이끌어온 정진행 사장은 현대건설로 자리를 옮겼다. 일부 부회장들이 고문으로 물러나는 등의 인사도 있었다.

한편 기아차 대표 시절 아우디와 폭스바겐 책임 디자이너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해 ‘디자인 경영’을 이끌었고 현대차에서도 다수의 해외 임원을 영입하는 등 공격적이고 개방적인 경영 정책을 폈다. 조직의 문화를 바꾸고 과감한 세대교체를 추진한 것.

정의선 현대차그룹 부회장(왼쪽)이 이규성 칼라일그룹 공동대표와 대담하고 있다 (사진=현대자동차 제공)
지난 5월 정의선 부회장(왼쪽)과 이규성 칼라일그룹 공동대표의 대담 모습  (사진=현대자동차 제공)

◇ 임원 겸직에 대한 비판도 제기...실력과 소통으로 정면돌파 하는 스타일

정의선 부회장은 올해 정기주주총회를 통해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의 대표이사에 취임했고, 기아차에는 등기이사에 올랐다. 사실상 그룹 경영의 전면에 나선 셈이다. 현대차 그룹의 후계자로서 예견된 일이지만 일각에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제기된다.

좋은기업지배연구소가 이 부분에 대해 다룬 바 있다. 연구소 이총희 회계사는 보고서를 통해 “정 부회장은 비록 계열회사지만 현대자동차의 경쟁업체인 기아자동차 임원이다. 현대차와 기아차는 연구개발이나 부품 등을 공유하고 있으나, 판매 및 영업 조직은 별도로 분리되어있어 이해 상충 소지가 존재한다. 따라서 경쟁 관계에 있는 두 회사의 임원을 겸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연구소측은 “정 수석부회장은 기아차 이사 외에 현대모비스와 현대자동차 현대제철의 사내이사를 겸직하고 있는데 과도한 겸직은 이사의 충실 의무를 저해할 수 있다”는 견해도 밝혔다.

일리 있는 반론이다. 하지만 한가지 짚어봐야 할 부분이 있다. 정의선 부회장의 경영 참여는 어디까지나 정상적인 방법으로 이뤄졌다 점, 그리고 그의 실력이 검증됐다는 점이다.

정의선 부회장의 능력에 관한 일화가 있다. 2017년 김상조 당시 공정거래위원장이 모 그룹 관련 재판에 증인으로 나와서 했던 발언이다. 김상조는 당시 “현대차그룹은 정몽구 회장이 정의선을 기아차 사장으로 임명하고 그룹 차원에서 지원해 기아차를 회생시켰다. 정의선의 능력에 대해 시장에서는 의구심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그룹 지배구조 개편을 두고 내렸던 결단도 화제였다. 현대자동차는 지난해 지배구조 개편을 위한 임시주총을 계획했다가 그 결정을 철회한 바 있다. 당시 정의선 부회장은 “시장에서 제기한 다양한 견해와 고언을 겸허한 마음으로 검토해 충분히 반영하겠다. 기업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지배구조 개편안을 보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정의선 부회장은 자신과 회사를 둘러싼 비판적인 의견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시장에서의 성과를 통해 본인의 실력을 스스로 검증하고 있다. 정 부회장은 25일 오전(현지시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대통령궁에서 조코 위도도 대통령과 면담했다. 동남아 시장 점검을 위한 출장 중의 스케줄이다. 이 자리에서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현대차는 가장 진취적인 회사로 세계시장에서 성공을 거둬왔다"며 "인도네시아에서도 적극 투자에 나서 꼭 성공해 달라"고 밝혔다. ‘왕회장의 장손’이 향후 국내 재계와 글로벌 시장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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