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경제신문 이한 기자] 기자는 오락실을 다녀본 경험이 많다. 중학교때는 밤새 컴퓨터 게임을 해본 기억도 있다.

게임 속 세계는 흥미로웠다. 그 속에서 나는 홈런 잘 치는 4번타자도 되고, 맨주먹으로 수십명을 쓰러뜨리는 싸움꾼이 되기도 했고, 명사수나 전투기 조종사가 된 적도 있다. 심지어 관우와 장비를 데리고 천하통일을 하는 삼국지 속 유비가 되기도 했다. 그 속에서 나는 지구 곳곳을 누비고 우주로 나갔고, 과거와 미래도 오갔다. 그 안에서 나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런 게임들은 금방 싫증이 났다. 속된 말로 ‘끝판 깨고’ 나면 두 번째 부터는 재미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언제 어디서 몬스터가 나타나 나를 공격할지 모두 알았고, 어느 타이밍에 어떤 기술을 쓰면 내가 이길지 모두 알게 되니까 말이다.

싫증 내지 않고 꾸준히 몰두하는 게임도 있었다. 친구랑 같이 ‘2인용’으로 즐기는 게임들이었다. 친구와 함께 전략을 짜서 협동하는 것도 흥미로웠고, 각자 서로의 모든 것을 걸고 치열한 맞대결을 벌이는 것도 재밌었다. CPU와 달리 친구와 나는 전략이나 생각이 늘 바뀌었고, 게임을 종료하고 나서도 친구와 그 내용을 가지고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와 내가 게임을 통해 또 다른 ‘관계’를 맺게 된 것이다.

그게 벌써 20년 전 얘기다. 그러면 요즘은 어떨까.

게임이 발전하고 다양해지면서, 유저들이 게임에서 맺는 관계도 다양해졌다. ‘길드’ ‘클랜’ ‘연맹’ 이런 단어들을 혹시 들어보았나? 게임 유저들이 그 속에서 서로 모여있는 조직을 뜻한다.

요즘 게임은 이런 경우가 많다. 이용자들이 자신의 상황과 취향에 맞는 게임 속 조직에 들어가 함께 즐긴다. 유저들은 다른 이용자들과 머리를 맛대고 전략을 모은다. 그들은 힘을 모아 CPU와 싸우고 게임 내 다른 조직과 협업하거나 전쟁도 한다. 게임에 익숙해지면 조직원도 늘어난다. 왜냐하면, 조직 인원수는 한정되어 있지만 게임 내 성과가 늘어나면 조직원 T.O도 늘어나기 때문이다.

◇ 게임은 커뮤니티고 건전한 취미다

<리니지>를 서비스하는 엔씨소프트 한 고위관계자가 기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요즘은 게임이 하나의 커뮤니티입니다. 유저들이 함께 모여 놀죠. 게임이 조금 지루해져도 같이 즐기는 멤버들 때문에 꾸준히 접속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경우는, 그 멤버들이 전부 함께 고스란히 다른 게임으로 가버리는 경우도 있어요”

기자도 100% 동의했다. 기자는 요즘 한창 인기 있는 모바일게임 유저고, 게임 안에서 연맹을 운영하는 ‘맹주’이며 연맹원 21명과 카카오톡 단체채팅방을 만들어 그곳에서 전략을 논의하거나 일상적인 수다를 떨기 때문이다.

게임에서 우리는 왕과 여왕, 맹주, 부맹주, 연맹원, 기사, 궁수, 검투사 같은 역할이 있다. 우리는 게임 채팅창에서 서로 (안면이 아니라) 아이디와 닉네임을 익혔다. 게임을 오래 하다 보면 급히 논의할 일이나 긴밀하게 상의할 일이 생기는 경우가 있어 몇 달 전 단톡방을 만들었다. 거기서 함께 전략을 짜다 보니 서로 친해져서 이제는 수다도 떤다. 나와 함께 전장을 누비던 궁수나 검투사가 사실은 M&A전문 변호사, 아이 둘 키우는 주부, 고등학생, IT기업 개발자, 셰프 라는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취미를 공유하는 불특정 다수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은 예전에도 많았다. 흔히 그런 곳을 ‘동호회’라고 불렀다. 우리는 게임 이용자로서 자발적으로 모여 개별적인 동호회를 만든 셈이다. 게임 제작사가 설정한 세계관 속에서, 개발자가 만든 맵을 따라 게임을 즐기던 개인 이용자들이 거기서 만난 게임 소비자들과 새로운 관계를 맺고 커뮤니티를 형성한 것이다.

요즘 ‘게임 과몰입’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맞다. 과몰입은 문제다. 하지만 기자는 게임에 ‘적당히’ 몰입한 덕분에 변호사와 개발자 친구를 사귀었다. 아이 둘 키우려면 얼마나 일이 많은지, 요즘 고등학생들은 입시 전략을 어떻게 짜는지도 들을 수 있었다. 게임이 아니었다면 가능했을까.

사람들은 말한다. ‘적당한 취미를 가져야 인생이 즐겁다’고 말이다. 기자는 게임이 즐겁고, 거기서 사귄 사람들과의 대화가 즐겁다. 게임이 내게 ‘중독유발 매개체’가 아니라 취미인 이유다. 
 

저작권자 © 소비자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