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경제신문 이한 기자] 당신은 혹시 한·일전의 짜릿함에 대한 기억이 있는가?

2006년 3월 기자는 일본 도쿄돔 야구장에 있었다. 제1회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대회가 개최되던 때였다. 당시 KBO(한국야구위원회)에서 각 구단 팬클럽을 대상으로 ‘국가대표응원단’을 구성했는데 기자는 한화이글스 팬클럽 대표로 응원단에 참가했다.

기자가 야구를 보면서 눈물 흘린 적이 딱 한 번 있다. 바로 그날, 8회에 이승엽이 역전 2점 홈런을 쳤을 때다.

한일전이 주는 몰입감, 수만명의 일본 관중 사이에서 수적인 열세를 딛고 응원하던 서러움, 경기 내내 뒤지다가 드디어 역전에 성공했다는 통쾌함...이런 것들이 겹쳐서 울음이 터졌던 것 같다. 그냥 눈물이 맺혀 또르르 흐르는 게 아니라 엉엉 울었다.

당시 기자는 서른 살이 채 되지 않은, 차가운 이성보다 뜨거운 감성이 더 중요하다고 믿는 팔팔한 20대 청년이었다. 지금은 야구장에 가면 주위 사람에게 민폐를 끼칠까봐 조용히 관전한다. 하지만 그때는 꽹과리도 치고 깃발도 흔들면서 시끄럽게 응원했었다.

그날도 그랬다. 얼굴에 태극마크를 그려넣고 꽹과리 두들기며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옆자리 동료들은 나팔을 불거나 북을 쳤고 ‘캉캉’ 소리가 나는 막대풍선을 바람이 다 빠지도록 두들기면서 응원했다. 우리는 태극기를 온 몸에 감은 채 방방 뛰었고 경기가 끝나고 나서는 벅찬 감동에 ‘독도는 우리땅’도 합창했다.

한일전이어서 그랬을까. 마치 광복 맞은 독립투사라도 된 기분이었다. 경기 끝나고 밤새 술 마시면서도 우리는 이승엽 얘기보다 ‘대~한민국!’이라는 구호를 더 많이 외쳤다.

이승엽이 날린 홈런 타구가 일본 캡틴 이치로 등 뒤로 날아갔다는 점, 코리아특급 박찬호가 9회에 올라와 상대 타자를 완벽하게 제압했다는 점, 일본 야구의 심장 도쿄돔에서 이겼다는 점...이런 것들이 기자 일행을 크게 흥분시켰다. 우리는 다음 날 아침 편의점 가판대에서 ‘충격! 열도 침몰’이런 류의 제목이 달린 현지 스포츠신문을 기념품삼아 싹쓸이 했다.

그때 기자는 왜 그랬을까? 야구는 그저 공놀이에 불과한데 말이다. 아마 상대가 ‘일본’이어서 그랬을거다.

당신들도 그러지 않나? 한국사람이면 축구팬이 아니더라도 국가대표 한일전이 열리면 무조건 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탁구 역도 배드민턴 하키...이런 종목에 관심이 없어도 상대가 일본이면 갑자기 몰입해서 보게 된다. 거기서 이기면 기쁨이 2배다. 아니라고? 에이, 솔직해지자. 국가대항전에서 남아공이나 베트남 선수를 이겼을 때와 일본 선수를 이겼을 때 팬으로서 느끼는 기쁨의 크기가 똑같단 말인가?

 

스포츠에 정치 논리를 투영하는 것이 옳은가?

그런데, 스포츠계에서는 이런 걸 나쁘게 본다. 국가주의 자체를 금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스포츠에 정치적인 이슈를 투영하는 것을 국제 스포츠계에서는 철저하게 금한다. 실제로 FIFA(국제축구연맹)에서는 골 세레머니에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으면 바로 징계를 내린다.

IOC(국제올림픽위원회)도 마찬가지다. 지난 2012년 런던올림픽 축구 3.4위 결정전에서 우리나라 대표팀이 일본을 꺾고 동메달을 차지했다. 경기가 끝난 후 국가대표 선수 한 명이 ‘독도는 우리땅’ 현수막을 들고 경기장을 뛰었다. IOC가 어떻게 했을까?

당시 IOC는 그 선수에게 A매치 2경기 출전정지와 400여만원의 벌금을 매겼다. 거친 반칙으로 퇴장을 당해도 출전정지 1경기에 그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우 무거운 징계다. 게다가 그 세레모니는 경기가 모두 끝난 후에 이뤄졌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징계를 내린 것은 ‘스포츠와 정치를 엮지 말라’는 분명한 메시지다.

그런데도 팬들은 스포츠에 정치 논리를 자주 대입한다. 그리고 주위에서도 그걸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 그럴까.

팬들은 ‘아마추어’여서 그렇다. 스포츠계가 정식으로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는 것은 안된다. 하지만 취미로 보는 팬들은 “다른 경기 다 져도 일본한테는 이기자”라고 말할 수 있다. 아마추어니까. 기자가 도쿄돔에서 ‘독도는 우리땅’을 불렀던 것도 혈기왕성한 20대 청년이고 야구인이 아니라 그냥 일반인 팬이어서 그럴 수 있었다. 기자가 만일 그 경기를 정식으로 취재하러 간 스포츠신문 관계자였다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요즘 정치적인 문제를 경제에 대입시켜 시끄러운 일을 만든 사람이 있다. 눈앞으로 다가온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려고, 흔들리는 본인의 정치적 입지를 뒤집으려고 경제 이슈를 정치화해버린 지도자가 있다. 멀리 있는 건 아니다. 바다 건너 옆 나라에 있다.

정치인은 (정치에 있어서는) 아마추어가 아니다. 옆 나라 지도자도 아마 정치 9단일게다. 그래서 여러모로 따져보고 손익계산 다 해보고 그런 조치를 했을거다. 하지만 정치와 경제를 하나로 묶어버린 건 정치 프로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프로가 아마추어처럼 행동하면 그건 ‘유치하다’는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다.

 

정치 관련 이슈를 정치적으로 풀지 못하는 정치인

한마디만 덧붙이자. 2006년 3월에 이치로 등 뒤로 홈런을 날렸던 이승엽은 원래 ‘삼성’ 라이온즈 소속이었다. 하지만 그 시즌에는 일본 명문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 4번타자였다. 일본 스포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요미우리가 얼마나 명문 구단인지 잘 알 거다. 그 팀은 일본 내 모든 종목을 통틀어 최고 인기 스포츠 구단이다.

요미우리 자이언츠는 ‘GIANTS PRIDE’를 내세운다. 자체 품위 유지 규정을 두고 선수들로 하여금 수염도 못 기르게 했던 팀이다. 보수적인 성향도 매우 강하다. 그 구단에서 외국인 선수가 개막전 4번 타자로 나선 것은 19년 만의 일이었다. 일본 언론과 팬들은 그 시절 이승엽을 ‘승짱’이라고 불렀다.

상상해보자. 만일 그 시절 “일본은 과거사 반성이 없으니 이승엽은 요미우리와의 계약을 당장 해지하고 한국에서 뛰어야 한다”고 했으면 어땠을까. 일개 야구팬이 인터넷 게시판에 쓰는 개인적인 의견 말고, 삼성 라이온즈 구단이나 KBO에서 공식적으로 저런 발표를 했다면 어땠을까. 아니, 조금 더 나아가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그런 지시를 내렸다면 어땠을까?

곧 열릴 선거 때문에 눈 코 뜰새 없이 바쁘겠지만, 옆 나라 정치 지도자는 이 부분을 깊이 돌아봐야 한다. 프로와 아마추어를 가르는 경계를 본인 스스로 무너뜨린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말이다.

정치 관련 이슈를 정치적으로 풀지 못하면, 그 사람에게 정치인 명함이 어울릴까?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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