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산업성, “반도체 등 제조에 필요한 3개 품목 수출 규제”
국내 업계 생산 일정 차질 우려 속, 업계와 정부 대책 마련 분주해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공장 1라인 항공사진. (사진=삼성전자)
일본이 재료 수출 관련 규제를 발표해 반도체 업계가 긴장 중이다. 사진은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공장 (사진=삼성전자)

 

[소비자경제신문 이한 기자] 일본 정부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 대한 대법원 배상 판결에 반발하며 경제 보복에 나섰다. 반도체 제조 등에 필요한 핵심 소재의 수출을 규제하는 조치다. 국내 기업의 생산 일정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그래서 ‘반도체 1위인 국내 업계를 상대로 재료 수출이 막히면 결국 일본이 손해’라는 시각도 있다. 각 기업과 정부는 대책 마련에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1일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한일간) 신뢰 관계가 현저히 손상됐다”고 전제하면서 “한국을 향한 수출관리 규정을 개정해 반도체 등의 제조 과정에 필요한 3개 품목의 수출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지난 주말 산케이신문이 보도한 내용을 공식화한 것.

◇ 韓 강제징용 피해 대법원 배상 관련 日 경제보복 예견된 일?

규제를 강화하는 세 품목은 스마트폰 디스플레이 등에 사용되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반도체 기판 제작에 필요한 감광제 ‘리지스트’, 반도체 세정시 사용하는 ‘에칭가스’(고순도불화수소)다. 이 품목들은 그간 일본 현지에서 수출 절차를 간소화 하는 우대 조치를 적용 받았다. 그러나 경제산업성 발표에 따라 앞으로는 규제를 받게 된다.

우대 대상에서 제외될 경우, 일본 기업은 해당 품목을 우리나라에 수출하려면 계약 별로 일일이 일본 정부 당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이 승인은 약 90일 가량 걸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서류 승인 등에 관한 규정이나 절차 등이 매우 까다롭고 시간이 많이 걸리기로 유명하다. 일본 한 현청에서 수년간 근무한 경험이 있는 국내 한 관계자는 “서류 결재나 승인 등의 과정이 전체적으로 꼼꼼하게 진행돼서 국내 업무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관련 업무 처리 속도가 매우 느리게 여겨질 것”이라고 말했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와 리지스트는 세계 전체 생산량의 90%, 에칭가스는 약 70%를 일본이 점유하고 있다. 이에 따라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등을 생산하는 국내 관련 기업들이 이번 조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현지 기업이 수출 건마다 매번 따로 승인을 받으려면 재료 수급 일정이 길어질 수 있고, 결국 생산 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다.

◇"결국 日 자충수 될수도"...국내 반도체 소재주가 상승 흐름

한편에서는 반대 시각도 존재한다. 해당 조치를 현실화하는 것은 일본의 자충수고, 관련 규제로 인해 오히려 국내 제조사 및 소재업체가 중장기 수혜를 입을 수도 있다는 전망이다. 이런 전망은 주로 증권사 등에서 나왔다.

KTB투자증권 김양재 연구원과 문정윤 연구원은 이날 내놓은 전망 보고서에서 “최악의 경우 단기 생산 차질이 불가피하지만, 과잉 재고를 소진하고 생산 차질을 빌미로 가격 협상력도 강화할 수 있는 기회로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날 정오 기준으로 국내 반도체 소재주들 일부는 주가 상승 흐름을 보이기도 했다.

한국이 반도체 최강국이어서, 국내에 재료 수출을 하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일본에게 악재라는 시선도 있다. 우리나라에 재료를 팔지 못하면 일본도 다른 판매처를 구하기 어렵다는 배경이다. 유진투자증권 이승우 연구원은 "일본 소재 업체들의 입장에서도 실적 타격이 클 수 밖에 없어 (현지 기업의) 반발이 예상된다"고 내다봤다. 이 연구원은 다만 “국내 반도체 업계가 긴장할 수밖에 없는 소식”임을 분명히 언급했다.

만일 한국 기업의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생산 일정에 차질이 생기면 해당 제품을 완제품으로 사용하는 글로벌 업체 역시 영향을 받는다. 결국 애플 등 미국 기업을 포함한 글로벌 기업들에게 그 영향이 고스란히 간다. 이 때문에 업계 일각에서는 ‘일본이 그런 부담을 감수하고 규제를 적극 강화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라는 의견도 제기된다.

해당 조치가 국내 업계에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두고 여러 의견이 오가는 가운데, 기업들은 우선 현재 보유 중인 재고 물량을 활용해 평소와 다름없이 공정을 운영할 계획이다. 다만 실무진들이 대책회의에 돌입하는 등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분주한 모습이다.

업계 관련자들은 말을 아끼는 추세다. 익명을 요구한 디스플레이 업계 한 관계자는 “기업과 기업이 파이를 나누기 위해 협상하는 문제가 아니고 외교 이슈가 얽힌 사안이어서, 지금은 (기업이) 이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할 타이밍이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민간 기업이 나서서 한 번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인 만큼, 정부 역할에 기대를 걸어야 한다는 의미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수출단가 하락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 또 다른 변수가 생겨서 대책 마련으로 분주하다”고 밝히면서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그에 맞는 대응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 정부, "WTO 위배...단호히 대응할 것"

정부 관련 부처도 입장을 내놨다. 박태성 산업통상자원부 무역투자실장은 1일 오전 수출입 동향 관련 브리핑에서 이 조치를 언급하면서 “WTO 협정상 원칙적으로 금지되는 조치”라고 규정했다. 박 실장은 “일본 측의 부당한 조치와 국제법 위반사항에 단호히 대응할 예정”이라는 메시지를 내놨다.

이와 더불어 박 실장은 “일본의 이번 조치가 사실상 수출 제한인지 아니면 절차적 규제인지 파악하고, 규제 품목이 국내 전체 공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지, 다른 제품으로 전환이 가능한지 등을 확인하겠다”고 밝혔다. 성윤모 산업부 장관은 오늘 오후 중으로 관련 회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지난 5월30일, 문재인 대통령이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함께 삼성전자 화성사업장을 방문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종합반도체 강국으로 자리매김하자”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 시장에 돌연 나타난 암초를 정부와 기업이 슬기롭게 극복해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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