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경제신문 이한 기자] '1988년식 르망'

기자가 어릴 때 탔던 우리 가족 첫 차다.

지금도 기억 난다. 올해 기자 나이랑 엇비슷했을 당시 우리 ‘아빠’가 하루 종일 창밖으로 주차장을 내다보던 모습을 말이다. 차가 잘 있는지, 혹시 누가 와서 흠집이라도 내지 않는지 궁금하셨을까? 당신은 아침 저녁으로 내려가 차를 닦고 또 닦았다. 내일 비가 온다는 뉴스라도 들리면 한밤중에 주차장으로 가서 차에 은색 비닐을 씌우셨다.

그 차에서는 진한 모과향이 났다. 몇cc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초등학생 기자가 뒷좌석에서 뒹굴며 놀기에는 충분히 넓었다. 운전석에 앉은 아빠와 조수석에 앉은 엄마의 뒷모습은 그 시절 기자가 기억하는 ‘우리 가족’의 대표적인 이미지 중 하나다.

엄마는 그 차로 아빠에게 운전을 배웠다. 지금은 고층건물이 잔뜩 들어선 양재동 어딘가에서 부모님이 자리를 바꿔 앉으셨다. 차가 몇 번 덜컹거리며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아빠는 엄마에게 “앞만 보지 말고 옆이랑 뒤도 봐야지”라며 소리를 치셨고, 엄마는 “왜 소리를 지르냐”며 더 크게 소리를 지르셨다.

그날 뒷좌석에서의 기억은 별로였다. 왜냐하면, 운전 연습 끝나면 자장면을 먹으러 가기로 했는데 안 갔기 때문이다. 엄마가 삐져서 안 갔는지, 아니면 아빠가 삐져서 안 갔는지는 지금도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집에서 밥을 먹었고, 아빠는 국이 있어야 식사를 하시는데 그날 저녁에는 밥과 반찬만 있었다는 기억 뿐이다. 주말에 부모님 댁에 가면 물어봐야겠다. 혹시 기억하실까?

기자는 그 차를 타고 아빠와 설악산 캠핑을 갔고 엄마랑 같이 할머니댁에 갔다. 방학이면 백마 고모네집도 자주 갔다. 백마는 일산 근처였는데, 그때는 일산에 신도시가 들어서기 전이었다. 고모네 집 옆에는 넓은 논이 있었고, 동네 분들은 나를 보면 “서울에서 차 타고 오는 집 아들‘이라고 불렀다. 중학교 때는 아침마다 아빠 옆에 앉아 학교에 갔다.

점수 낮은 성적표를 받은 다음 날이면 차에서 딱히 할 말이 없어 뻘쭘했고, 성적이 오른 날이면 학교 내리기 전에 혹시 엄마가 모르는 용돈이라도 몰래 받지 않을까 기대하며 가슴이 콩콩 뛰던 기억도 난다. 급성 천식이 와서 새벽에 숨이 안 쉬어진 적이 있는데 그때 기자를 응급실에 데려다 준 것도, 군 입대 후 첫 휴가 나왔다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복귀하는 기자를 부대 근처까지 데려다 준 것도 바로 그 르망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또 흘렀다.

2008년에 기자도 차를 샀다.

기자에게 차를 판매한 영업사원이 '오래 된 그 차를 매입해주겠다'고 제안했다. 30만원 정도 준다고 했던 것 같다. 제안을 받아들였다. 21년 된 낡은 차를 영맨에게 보내기 전날, (이제는 아빠가 아니라) 아버지는 한동안 그 차 운전석에 혼자 앉아 계셨다. 괜히 시동도 한 번 걸어보고 ‘부웅’소리가 나도록 엑셀도 밟아보셨다. 아버지는 “아직 엔진은 쓸 만 한데...” 하면서 차 본넷을 한번 스윽 쓰다듬은 다음 차키를 내게 넘겨주셨다. 88년생 르망은 그렇게 내 곁을, 아니, 우리 가족 곁을 떠났다.

기억을 돌려보자. 당신에게도 ‘우리 가족 첫 차’에 대한 기억이 있을거다. 차에서 나던 냄새, 조수석이나 뒷좌석에서 보던 우리 가족의 얼굴과 창 밖 풍경, 그리고 그 차가 데려다 준 곳들, 거기서 가족과 나눈 얘기들 말이다.

이제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그런 기억을 물려줄 때다. 우리 아이들도 그런 풍경을 보고, 그와 비슷한 냄새를 맡고 있을거다. 자동차는 가족들이 공유하는 가장 친밀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넉넉하고 듬직한 공간을 아이에게 선물해주자. 그리고 그 공간을 안전하게 지키자. 천천히 달리고, 안전벨트도 꼭 매자. 우리 머리와 가슴에 명징하게 남아 있는 위와 같은 추억들을, 우리 아이들도 평생 간직하고 살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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