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사이드 부분 드릴링 시스템 유럽업체로부터 수입, 조립 수준
높은 진입장벽 극복이 관건, 정부지원·연구&개발 필요성 제기

삼성중공업이 건조, 인도한 극지용 드릴십  사진제공=삼성중공업.
삼성중공업이 건조, 인도한 극지용 드릴십 사진제공=삼성중공업.

[소비자경제신문 임준혁 기자] 한국 대형 조선 3사의 전유물로만 여겨져 오던 시추선인 드릴십의 핵심 부품의 국산화가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드릴십(Drillship)은 파도가 치는 바다 위에 떠서 깊은 바닷속에 구멍을 뚫어 석유·가스 등을 시추하는 선박을 말한다. 선박 가격은 최소 5억달러에서 최대 10억달러에 이른다.

3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최근 5~6년 사이 삼성중공업이나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드릴십을 수주, 건조하는 국내 대형 조선소들의 드릴십 수주가 전무했다. 들쭉날쭉하는 국제유가 추이와 발주사인 오일메이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대우조선해양이 가장 최근에 수주한 드릴십은 2013년 5~6억달러에 수주한 1척이 전부일 정도다.

문제는 현재 국제 유가가 상승하고 셸 등 글로벌 오일 메이저들이 드릴십을 한국 조선소에 발주한다 해도 핵심 부품을 외국에 의존한다는 데 있다.

드릴링 시스템은 드릴십의 핵심 설비로 시추관(드릴파이프) 끝에 달려 있는 드릴비트의 회전력과 시추관을 통해 비트로 분사하는 특수 진흙을 사용, 해저를 뚫는다. 드릴십은 크게 선체부분인 헐과 앞서 설명한 드릴링 시스템 장치가 탑재되는 톱사이드 등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한국 조선산업이 현재보다 양호했던 2010~2012년 사이 대량으로 드릴십이 발주됐다. 국내 조선 빅3가 골고루 수주한 이 드릴십에 탑재된 시추설비는 전량 유럽이나 미국의 전문 기자재 업체로부터 수입해 온 것들이다.

지난 2010년 6월 드릴링 시스템 분야에서 세계 1위인 미국 NOV社가 국내 조선해양 기자재업체 호창기계를 약 1000억원에 인수한 바 있다. 업계에 따르면 NOV는 당시 인수한 호창기계를 통해 '데릭(derrick)'이라는 철골 구조물을 생산하기로 했다. 시추용 파이프를 지탱하는 장비로 지금까진 NOV가 유럽 자회사에서 제작했다.

NOV는 미국 텍사스 휴스턴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전 세계에 자회사 152개, 종업원 3만6000명을 두고 있는 해양설비 분야 대형 그룹이다. 아시아권에 자회사를 두기는 처음이다.

NOV는 그동안 국내 조선업체에 드릴링 시스템을 독점 공급해 왔다. 대우조선해양 고위 관계자는 “드릴십을 애써 만들어도 이익의 3분의 1을 NOV에 줘야한다”며 “시추 장비를 국산화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라고 말할 정도로 기술 독점력이 막강하다.

실제 2005년부터 2009년까지 한국의 조선 3사는 34척, 총 170억달러에 달하는 드릴십을 수주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34억달러를 NOV로부터 핵심 부품인 드릴링 시스템(척당 1억달러)을 사들이는데 썼다.

삼성중공업 관계자는 “NOV는 유럽, 미국에 있는 자회사들의 수직 계열화를 통해 세계 시추 장비 설계와 제작을 독점하다시피하고 있다”며 “기술 유출을 철저히 막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비단 드릴십의 드릴링 시스템에 국한되지 않는다. 국내 대형조선소의 상선 부문을 제외한 해양플랜트에도 부품 및 기자재의 국산화율이 낮다는 데 있다.

한국조선해양기자재공업협동조합(KOMEA) 황선우 실장은 “드릴십 등 해양 설비 부품 국산화율이 최대 25%에 불과하다”며 “국내 부품업체들은 드릴십에 헐 부분에 들어가는 강관이나 전선(케이블) 정도만 납품하는 수준”이라며 국내 해양플랜트 기자재 시장의 수입의존도가 높음을 토로했다.

익명을 요구한 또다른 업계 관계자도 “조선업체들이 드릴십, FPSO 시장을 석권하고 있지만 설계는 대부분 해외 업체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컨테이너, 액화천연가스(LNG)운반선, 유조선 등 조선(상선)산업의 부품 국산화율(설계 포함)이 95%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수입 의존도가 매우 높다”고 지적했다.

조선기자재 업계 관계자는 “선주들이 드릴십이나 FPSO를 한국 조선소에 주문할 때 기자재를 어디서 조달해야 할지도 패키지로 묶는 경우가 많다”며 “국내 기자재 업체가 해당 시장에 진입하기엔 장벽이 너무 높다”고 말했다.

결국 드릴십 수주 붐이 불어 발주량이 늘어도 국내 조선소는 헐 부분만 건조하고 나머지 톱사이드 부분은 주요 부품과 장비를 유럽 등지에서 전량 수입해 조립만 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처럼 해양플랜트 부품 국산화율이 낮은 이유는 자명하다. 기술력이 없기 때문이다. 꾸준히 해양플랜트 부품산업을 발전시켜온 유럽이나 일본 기업과는 다른 모습이다.

드릴십이나 해양플랜트 시장에서 국내 대형 조선사들은 아직 새내기다. 주요 발주처인 오일메이저 요구에 맞춰줄 수밖에 없다. 국내 대형 조선사 관계자는 “해양플랜트 주요 부품들은 주문할 때부터 발주처에서 자국 기업이나 협력사 제품으로 지정한다”며 “우리가 직접 만들거나 협력사를 통해 개발하더라도 납품 경험이 전무해 시장 진입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부산에 위치한 조선해양기자재 글로벌지원센터의 한 간부는 “정부와 대기업이 해양플랜트 핵심 부품 국산화에 앞장서야 한다”며 “부품기업들도 강점을 지닌 상선 분야 부품으로 외국시장을 적극 공략해 자생력을 갖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나 연구·개발이 이뤄지지 않는다면 ‘드릴십을 아무리 수주해도 도크만 제공하고 껍데기만 만드는 과거의 한국 조선의 민낯’을 계속 볼 개연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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