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향순 대표 "대기업에 밀리지 않는 기업으로 우뚝 설 것"

해주부용식품 직원들이 만두 성형을 하고 있다.(사진=소비자경제)

 [소비자경제=권지연 기자]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코앞에 두고 있다. 경색됐던 남북한 관계가 풀리고 긴장이 완화하고 있는 것은 매우 반길 일이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우리 주변에 이미 와있는 탈북자들의 삶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 걸까.

19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 시절에는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남한 땅을 밟은 탈북자가 대다수였지만 이제는 다르다. 자녀 교육, 더 넓고 자유로운 삶에 대한 동경 등 탈북의 이유도 다양하다.

남한 땅에서 도움을 받아야 할 수혜자로 머물러만 있는 것도 아니다. 2005년 남한에 와 당당히 사회적 기업의 대표로서 안전한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작은 통일을 먼저 이루며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해주부용식품의 윤향순 대표를 <소비자경제>가 만나봤다.

◇ ‘포용’과 ‘나눔’의 가치 실현하는 행복한 일터

인천 남동구에 위치한 작은 만두 공장 안은 얼핏 보기에도 매우 바쁘게 돌아간다. 매일 아침 구월동 농산물시장에서 사 온 신선한 야채와 고기를 썰고 섞는 작업부터 만두를 성형하고 포장하는 작업이 한꺼번에 진행된다. 

직원은 총 7명. 모두 고령이거나 북한이탈주민이거나 다문화 이주여성이다. 2012년 문을 열고 2015년 사회적 기업으로 새로운 출발을 알린 ㈜해주부용식품의 풍경은 한바탕 전쟁을 치르 듯 치열하고 생기 있다.

윤향순 대표는 남한에 와 사업을 시작한 후 "걸음걸음이 위기였다"고 말한다. '위기'를 말하는 얼굴치곤 자신감이 깃들어 있다. 얼굴로 드러나는 자신감은 다름 아닌 ㈜해주부용식품에서 생산하는 만두에 대한 자신감이다.

해주부용식품은 양재 하나로마트와 태평백화점 사당점, 세이브존 성남 부천 성남, 노원점 등에도 납품된다. 작은 공장 제품이 대형마트의 진입 장벽을 뚫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비결을 묻자 대번에 "제품의 우수성"이란 대답이 돌아온다.

윤 대표의 포기를 모르는 끈질긴 기질도 한몫했다. 그녀는 "백화점과 대형마트 진출을 위해 백화점 야외 행사 시, 몰래 시식 행사도 진행하곤 했다"면서 웃었다. 대학가나 번화가에서 시식행사를 지속적으로 열면서 입소문이 났고 결국 대형마트 진출에 성공했다.

하고많은 음식 중 왜 만두였냐는 질문에 대한 윤 대표의 대답은 간단했다. 2005년 탈북한 윤향순 대표는 갖은 고생 후 어렵사리 사업을 시작하면서 가장 북한스러운 음식을 만들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고 한다. 그 중 가장 자신 있고 오래 보관이 가능한 음식이 만두였던 것.

북한식 만두를 고집하며 속 재료를 선정하다보니 숙주, 돼지고기, 표고버섯 등을 듬뿍 넣지만 절대 넣지 않는 재료가 있다. 당면과 조미료다. 고기를 갈지 않고 썰어서 식감을 살리는 것도 해주부용식품 만두만의 특별한 점이다. 식품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2016년 3월 15일에는 해썹 인증도 받았다.

해썹(HACCP) 인증은 식품의 원재료 생산에서 부터 최종소비자가 섭취하기 전까지 각 단계에서 생물학적, 화학적, 물리적 위해요소가 해당식품에 혼입되거나 오염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위생관리 시스템이다. 인증 철차가 까다로운 것은 물론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에 소규모 기업에겐 여간 부담스런 것이 아니다. 부담이 컸던 만큼 시설을 갖춘 후 자신감과 자부심은 배가 됐다. 윤 대표는 시간만나면 공장에서 직원들과 함께 만두를 만든다.

대표라고해서 명령만 내리는 일은 없다. 북에서 왔다는 점과 나이가 어리다는 점 등 약점으로 비춰질 수 있는 것들을 커버하기 위해 더욱 일의 완성도를 높이려 악바리처럼 덤볐던 윤 대표다. 서로 옥신각신 부딪히며 일하는 동안 미운정, 고운정이 쌓이다보면 속이 꽉 찬 만두처럼 직장 분위기도 내실을 다져갈 수 있었다. 

예쁘게 성형된 만두가 쌓여가고 있다.

 

속이 꽉 찬 만두가 성형기를 통해 나오고 있다.

 전직 북한 아나운서, 트럭행상에서 보험설계사까지 고된 남한살이

북에서 아나운서로 활동했던 윤 대표는 남한보다 부의 편중이 심한 북한에서 부를 누리는 부류에 속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남편이 갑작스럽게 탈북하자는 말에 펑펑 울었다고 했다. 

윤 대표는 "100평이 넘는 넓은 집에서 살다 정부지원 작은 아파트에서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절벽 앞에 선 느낌"이었다고 회상했다. 남한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겠다는 남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윤 대표는 트럭에 생선을 싣고 장사를 시작했다.

"남한 정부가 35살 까지만 대학 등록금을 지원해줘요. 남편은 나이가 많아서 지원을 받을 수가 없어서 제가 뒷바라지를 해야 했죠."

땡전 한 푼 없는 윤 대표에게 다행히 지인이 500만 원을 빌려주었다. 그 돈으로 390만 원짜리 중고트럭 한 대를 사고 보험 가입에 110만 원을 쓰고 나니 남은 돈은 꼴랑 60만 원.

윤 대표는 새벽마다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수산물을 사서 트럭에 가득 싣고 연수동 거리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도 새벽 4시면 눈을 뜨고 늦은 밤까지 장사를 해야 하는 고달픈 시간이다. 집에 들어갈 시간쯤이면 온 몸이 녹아내리는 듯, 지치곤 했다.

깜빡 졸아 난간을 들이박거나 앞 차 범퍼를 박살낸 기억, 장사꾼들끼리 자리싸움하며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던 기억 등, 1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생생하다.

이후 6개월이 흘러 마트 생선 코너자리를 받아 장사에 전념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윤 대표는 "생선 냄새 풀풀 나는 자신을 보며 이대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전했다.

나날이 성장해가는 남편과 비교하면 한 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결국 그녀는 생선 가게를 접었다. 무언가 자신을 성장시킬만한 것이 필요했다. 돈도 벌면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곳, 윤 대표가 향한 곳은 보험회사다. 

2년간 보험설계사로 일하는 동안 남편은 정육점을 시작했다. 처지는 금 세 역전됐다. 매일 예쁘게 차려입고 출근하는 윤 대표에게 심술부리는 남편을 안심시키기 위해 남편이 운영하는 정육점 옆에 순대국 집을 오픈했다. 

오픈 기념행사로 이웃에 나누어 주었던 북한식 순대가 인기를 끌면서 순대국집은 꽤 잘 됐다. 그렇게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모든 것이 순탄하다 여겨질 때 쯤, 그간 몸을 너무 많이 혹사시킨 탓이었을까, 윤 대표가 쓰러졌다.

결국 정육점과 음식점을 모두 접고 신장 투석을 받으며 힘겨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지금의 해주부용식품은 윤 대표가 투병 중에 차린 사업채다. 윤 대표가 직원들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이유도 지난해 이식 수술을 받느라 자신이 없는 동안도 흔들리지 않고 회사를 지켜 준 고마움이 크기 때문이다.

'장애 2급' 판정을 받고 의사는 몇 달은 쉬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윤 대표는 보름 만에 회사에 나왔다. 사람들은 '대단하다' '악착같다'고 말하지만 윤 대표에겐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직원들에 대한 책임감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 회사 직원들은 취약계층 이잖아요. 월급 한 달 밀리면 생계가 곤란해져요. 힘들어도 저 사람들 월급은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무척 컸던 것 같아요."

여전히 월세를 면치 못하는 윤 대표는 "돈 벌려 하는 짓이면 절대 못할 것이다"라며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웃었다.

◇ ‘돈’보다 중요한 ‘나눔’의 가치

윤 대표의 최근 가장 큰 고민은 매출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품질을 유지하는 것이다. 대형마트에서 판매하는 것은 남는 것이 별로 없다. 수수료를 약 25%를 본사에 떼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판매 아르바이트생도 고용해야 한다. 재료값이 자꾸만 오른다. 윤 대표는 "돼지고기 가격이 몇 배가 올랐다. 우리 만두에는 돼지고기가 많이 들어가니까 그 가격 부담도 만만치 않다"고 말했다.

윤 대표는 '대형마트, 대기업에도 기가 눌리지 않고 당당하게 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전통시장 납품을 시도한 것도 이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쉽지 않다. 전통시장에서는 무조건 단가를 낮추려다보니 원가 5900 원짜리를 2천원에 줘야 할 상황이라는 것.

윤 대표는 "가격을 무조건 낮추려다보면 품질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 제품의 차별화가 전혀 없어지는 셈"이라며 맛과 질로 승부하겠다고 밝혔다.

또 한 가지 윤 대표에게 숙제가 있다면 오는 탈북자들이 제대로 설 수 있는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대표로서 기준과 원칙을 가지고 모든 직원을 공정하게 대해야 한다는 신념도 흔들림이 없다. 그럼에도 탈북자 직원들이 같은 고향 출신 대표에게 바라는 것이 과할 때가 있다. 윤 대표가 무조건 탈북자 편이 되어 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윤 대표는 "나한테 와서 어려운 점을 얘기하면 내가 안아줘야 하는데 내가 관여하면 직원들과 못 어울릴 것이라 생각해 관여하지 않는다. 그러면 많이 서운해 한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는 탈북자 3만 시대를 열어가는 지금, 탈북자들의 취업률이 낮은것에도 안타까움을 전했다. "탈북자 취업률이 3%가 안 된다고 하니 정말 안타깝다. 나도 여기서 직원들을 대하다보면 남한 살이에 적응 못하고 금새 일을 그만 두는 탈북자들을 본다. 그때마다 너무 안타까워 가슴을 치곤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통일은 쉬운 것이 아닌 것 같다"며 너털웃음을 보였다.

◇ 가장 큰 소원, "아동시설 짓고 싶어"

남한에 와 가장 힘들었던 것은 생계를 위해 밤낮없이 뛰어야 하는 것도 탈북자에 대한 차가운 시선도 아니었다. 세 살짜리 어린 아기를 품에서 떨쳐내고 왔다는 자책과 그리움이다.

윤 대표는 "처음에는 그만한 또래 아이들만 봐도 미칠 것 같았다"며 괴로움을 전했다.

"아기를 북에 두고 온 마음은 찢어졌지만 그것을 제대로 내색할 수도 없었어요. 몰래 눈물 짓는 날이 많았던 만큼 비 오는 날은 마음껏 울 수 있는 날이었죠."

빗물에라도 괴로움이 씻겨나가기를 바랐던 것일까. 비오는 날이면 우산을 쓰지 않은 채 주변을 배회하곤 했다.

이러한 윤 대요의 가장 큰 소원은 "아이를 맘껏 키워보는 것"이다. '내 아이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아동 시설을 만드는 것' 어쩌면 원대할지 모를 꿈을 이루기 위해 윤 대표는 오늘도 '돈 보다 중요한 가치'를 되새기며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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