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드림 가정의학과 이동주 원장

[소비자경제 칼럼] 병원에는 여기 저기 아프신 노인 분들이 많이 찾아오십니다. 대부분 노화에 따른 퇴행성 변화로 인한 증상들이라 적극적인 치료보다 적절한 진통소염제를 처방하며 보존적인 관리를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저희 병원에도 허리가 아프셔서 자주 오시는 할머니 한 분이 계십니다. 자주 오시는 분이다보니 병원 직원들도 자기 할머니처럼 대하며 할머니 또한 병원을 자기 집처럼 편하게 생각하시는 그런 환자분 입니다. 어느 병원에나 이렇게 가족 같은 환자분들이 있기 마련이고 이런 분들에게는 다른 의사선생님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저 또한 뭐 하나라도 더 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인지상정인 것 같습니다.

그날도 이 할머니께서 허리가 아프다고 오셨고 평소에 드시던 진통 소염제를 처방해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할머니께서 평소와 다르게 ‘오늘은 전보다 허리가 더 아픈 것 같아’라며 혼잣말을 하시며 진료실을 나가시는 겁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저는 무언가 하나라도 더 해드리고 싶은 마음에 평소에는 놔드리지도 않던 소염제 주사를 놔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할머니들은 대체로 주사 맞는 것을 좋아하시지만 평소에 제가 주사제로 통증 조절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다보니 저에게 주사를 놔달라는 말도 잘 못하시는 편이라 혼자말로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것을 들은 이상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할머니는 제가 주사를 놔드리겠다고 하니까 아주 고마워하시며 흔쾌히 주사실로 가셔서 근육 주사로 디클로페낙이라는 성분의 주사를 맞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할머니가 주사를 맞고 잠시 뒤에 일어났습니다. 주사를 맞으시고 수납하기 위해 대기하시던 할머니가 대기실 의자에 털석하고 주저앉으시더랍니다. 간호사는 할머니가 이상하시다며 저를 급히 불렀고 할머니는 어지럽다는 증상을 호소하시면서 얼굴빛이 창백해지셨습니다.

얼른 회복실 침대로 할머니를 옮기고 혈압과 맥박을 측정했더니 매우 낮은 수치로 측정이 되었고 할머니는 겨우겨우 의식을 놓치지 않는 수준이었습니다. 말로만 듣던 디클로페낙으로 인한 쇼크였습니다. 잘 알려져 있는 부작용이기는 하지만 이렇게 실제로 경험해보기는 저도 처음이었습니다. 통증조절을 위해 그간 아무 문제없이 흔하게 사용되는 주사였고 다른 환자도 아니고 정말 아끼는 환자 분을 위해 사용된 주사제가 이런 부작용을 일으키게 되니 얼마나 당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다행히도 그 할머니께서는 응급 처치 후에 큰 문제없이 회복되셨습니다. 오히려 나중에 자기가 병원에 폐를 끼쳤다며 직원들에게 빵까지 사다 주셨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저는 그 사건 이 후 꽤 오랜 시간 후유증을 겪어야 했습니다. 별 문제 없이 회복이 되셔서 다행이었지만 혹시라도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라도 했다면 어쩔 뻔 했을까 하는 상상에 순간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졌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평소에 아무렇지도 않게 하던 일들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 매일 매일이 지뢰밭을 걷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하고 있는 일들이 아무리 가벼운 일이라도 얼마나 위험해질 수 있는 일이었는지 새삼스럽게 각성하게 되는 계기였습니다.

지난 글에서 근거 중심 의학에 대해 말씀드리면서 의학에서 효과가 있다는 말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봤었습니다. 의학에서 효과가 있다는 의미는 철저한 과학적 검증을 통해 긍정적인 효과가 부정적인 효과보다 통계적으로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쉽게 말해 득이 실보다 더 기대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는 다시 말하면 의학적으로 기대되는 효과가 부작용보다 더 크다는 의미이지 부작용이 없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어떤 의학적 치료도 기대하는 효과가 아닌 다른 작용을 할 가능성이 있으나 그러한 가능성이 기대하는 효과에 비해 매우 적기 때문에 의학적인 효과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현대의학이 가지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의학적 치료를 기대하는 효과를 위해 적용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원하지 않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이 본질적으로 내포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의학뿐 아니라 어느 분야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아무리 정성스럽게 물건을 만들어도 불량품이 있을 수 있고 자동차 수리를 맡겼으나 더 나쁜 결과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대부분 회복과 보상이 가능한 것들이지만 의료 현장에서 다루는 문제는 건강과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저 ‘확률 상 가능한 일이다’라는 말로 문제를 규정하기에 부족함이 느껴집니다.

아무리 0.001%의 확률의 문제라 할지라도 당사자에게는 100%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조심을 하고 주의를 기울여야 함은 물론이지만 의학의 본질은 그렇게 간단하게 조심한다고 통제할 수 있는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데 그 어려움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할머니의 디클로페낙 쇼크 부작용의 경우, 다행히 할머니께서 큰 문제 없이 회복이 되셨지만 혹시라도 후유증이 남거나 돌아가시기라도 했다면 이 상황에서 잘못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디클로페낙을 제조한 제약회사인가요 그것을 약물로 허가한 국가인가요 그것을 처방한 의사인가요 그것을 주사한 간호사인가요 아니면 그러한 체질을 가진 할머니가 잘못인가요. 이것은 하나의 예일 뿐이지 유사한 문제들은 의료 현장 곳곳에서 경험할 수 있는 문제들입니다.

의사들은 이러한 필연적인 위험에서 보호받고 싶은 것입니다. 의사도 자신의 과실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의료 행위 중 발생하는 모든 사고가 의사의 과실로 인한 것은 아니며 이는 의학적으로 효과 있는 치료가 본질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국가의 역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른 국가처럼 의사의 과실이 없는 의료 사고에 대해 책임을 져주고 환자와 의사 사이에서 갈등을 조정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얼마 전 이러한 취지로 신해철법으로 불리는 의료분쟁조정법이 개정이 되었을 때 많은 의사들은 안도감보다 오히려 심한 고립감을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이 법을 통해 의사들은 국가가 이러한 의학의 한계를 인식하고 의사를 이러한 문제에서 보호해주고 있다기보다 모든 의료 사고는 의사의 과실로 인한 것이고 의사는 자신들의 전문 지식을 가지고 이를 은폐하는데 능숙하니 의사의 과실을 밝히는 것을 국가가 나서서 도와주겠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법은 의사들이 느끼고 있는 것만큼 ‘의사들을 때려잡는’ 성격의 법은 아니라고는 합니다만 이 법을 통해 중환자를 치료하던 중 환자가 사망하게 된 경우 최선을 다해 치료에 임했던 의사까지도 쉽사리 소송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과 산부인과의 분만 중 불가항력적인 의료사고에 대해 의사의 무과실이 증명이 되어도 30%의 분담금을 책임지라는 조항이 있다는 것만 보아도 국가가 이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도 치료를 받는 중에 억울한 일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의료적 과실은 공정하게 밝혀져야 합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의료인도 의료적 행위의 본질적인 위험에서 보호받아야합니다. 잘못한 것도 없이 한순간에 살인자가 되고 진흙탕같은 소송에 노출되어도 되는 의료인은 없습니다. 분만 중 불가항력적인 의료사고와 같은 경우는 일본이나 대만처럼 국가에서 책임져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만약, 의료인들이 앞으로 이러한 위험에서 보호받지 못한다면 그 결과는 점점 더 중환자 치료를 기피하고 위험한 의료분야가 소외되는 결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의료 사고보다 더 심각한 국민 건강의 위험 요소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문제들은 이미 예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어버린 문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음에는 이미 우리나라 의료 사회에서 드러나고 있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좀 더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해드림 가정의학과 원장

저작권자 © 소비자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