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적 위기 가운데 ‘희망의 별’된 ‘강감찬’…어지러운 오늘날 큰 귀감

 

[소비자경제=이창환 기자] 어린 자녀를 둔 부모들이나 연인들에게 우리 역사를 탐방하고, 함께 산책하기도 좋은 문화유적지 한 곳을 소개한다.

2호선 낙성대역을 나와 남쪽(서울대 기숙사)으로 600m를 들어가면 낙성대공원이 나온다. 바로 이곳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된 낙성대가 있다. ‘낙성대’는 강감찬 장군의 출생지로서, 그가 출생할 때 ‘별이 떨어졌다(落星;낙성)’고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초기 문신인 성현(成俔:1439~1504)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강감찬이 몸집이 작고 귀도 작았다’고 전해지나 강감찬의 관상만은 귀인상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송나라 사신을 만나러 가는 길에 ‘키 크고 잘생긴 선비를 관리 복장을 하게 하고 자신은 허름한 옷을 입고 그 뒤에 섰는데, 사신이 한 눈에 강감찬을 알아봤다’고 한다. 선비를 보고 “용모는 비록 크고 위엄이 있으나 귀에 성곽(城郭)이 없다” 하고 강감찬에게 두 팔 벌려 절하며 “염정성(廉貞星)이 오랫동안 중국에 없더니, 동방(東方)에 있습니다”라고 했다고 적혀있다.

고려 초·중기 나라는 안팎으로 혼란스러웠다. 정변으로 왕들이 바뀌고, 거란은 갖은 이유로 침략을 일삼았다. 이런 상황속에 고려는 송나라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쇠퇴기에 접어들었던 송나라는 거란과 동맹까지 맺고 있던 터였다.

잦은 거란의 공격은 소합탁(거란의 장수)이 패배하면서 소강기를 갖게 됐는데, 이 기간 동안 고려는 또 있을 거란의 침략에 대비해 군사를 훈련시키고 20만 대군을 조성해뒀다. 이 대군을 지휘한 이가 평장사(고려 2품 관직으로 차관급, 군의 ‘중장’에 해당) 강감찬 이었다.

거란의 ‘소배압’은 기습부대의 공격을 받아 퇴각하다가 마지막 ‘귀주’에서 팽팽히 맞서게 되는데 김종현의 부대를 가세시킨 강감찬은 북쪽으로 부는 바랍을 타고 적을 끝까지 추격·몰살시킨다. 십 수만의 대군중 소배압은 단 수천만 데리고 압록강을 헤엄쳐 건너가면서 거란의 침략야욕은 사그라들었다. 이 전투가 바로 ‘귀주대첩’이다.

강감찬의 ‘귀주대첩’은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조선 장군 이순신의 ‘한산대첩’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대첩으로 불린다.

이 후에도 강감찬은 매우 청렴하게 지냈다 한다. 의복도 검소했고 겉치장에 신경 쓰지 않았으나 나라일을 할 때는 앞서서 열심을 다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이익과 재산 모으기에 앞서는 관리들과 달리 자신의 토지마저 부하와 백성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워낙 청렴결백으로 많은 백성들이 따랐던 강감찬은 훗날 벼슬에서 물러나 자연과 책을 벗삼아 조용히 살다가 여생을 마쳤다.

서울시에서는 이런 그의 충정을 기리고자 1973년부터 2년간 이곳을 정화하면서 사괴석(四塊石)으로 409m의 담장을 쌓고 사당 안국사(安國祠)를 지었는데, 이것이 곧 낙성대이다. 1974년 6월 10일 안국사 완공후 서울시는 공원으로 지정해 총면적 3만 1350㎡ 중 1만 1550㎡(약 3500여평)만 성역화했다. 안국사의 면적은 237.6㎡이다.

경내에는 고려시대에 건립된 삼층석탑이 있고 탑에 ‘姜邯贊落星垈(강감찬낙성대)’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 탑은 원래 강감찬이 태어난 봉천동 218번지 집터에 있던 것을 1973∼1974년 정화사업에 따라 현위치로 옮겨, 터에는 따로 유허비를 세워 사적지임을 표시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석탑의 대석을 비틀어 어기고 탑의 위층을 빼어 한 층을 낮추어 정기를 줄이고 탑 안에 있던 보물을 훔쳤고, 주위에 있던 병풍바위와 선돌바위도 모두 부수고, 혈맥을 끊으려 탑의 동쪽 구릉을 파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현재는 강감찬 생가터 옆으로 강감찬 전시관이 운영되고 있으며 낙성대 관리사무실에서 공원으로 관리하고 있다.

학생들이나 연인들이 방학이나 주말에 이 곳 낙성대공원을 찾아 우리 역사를 탐방하고 산책하기엔 안성맞춤인 공간이다. 또 옆으로 서울특별시 과학전시관이 함께 있어 무료주차장을 이용하는 고갱들이 낙성대와 과학전시관을 함께 이용할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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