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셋, 임신 7개월 째에 거사 동참...이후의 흔적 남아있지 않아

독립운동가 안경신 (출처=독립기념관)

[소비자경제= 양우희 기자] 잊혀진 독립운동가 4편에서는 임산부의 몸으로 평안남도 도청에 폭탄을 투척한 안경신 선생을 소개 한다.

지난해 5월,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안경신은 평안남도 대동 출생의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평양여자고등학교 2년 과정을 수료한 인물이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평양 서소문 지역에서 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안경신은 이 일로 29일간 구금됐다가 풀려났다. 이후 3.1운동의 영향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전국적으로 항일운동단체가 조직되자 이 시기 안경신은 대한애국부인회의 교통부원으로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던 중 1910년대 일제의 무단 통치로 독립운동세력에 대한 대대적 검거가 이뤄짐에 따라 대한애국부인회 조직 역시 일제 경찰에 발각돼 활동에 어려움을 겪게 됐다. 이에 그는 1920년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하게 된다. 중국으로 이동한 후 그는 임시정부의 군사기관인 광복군총영에서 활동했는데, 광복군총영은 1920년 미국의원시찰단이 한국을 방한할 때 폭탄거사를 실행하기로 계획했다. 세계여론에 한국 독립을 호소할 필요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이 계획에 참여하는 여러 개의 결사대중 제 2대에 소속된 안경신은 폭탄을 직접 가진 채 평양으로 숨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을 검색하는 경찰 1명을 쏘아 죽인 그는 1920년 8월 3일 밤, 평남도청에 폭탄을 투척했다. 이 계획으로 평남경찰부 건물이 파괴됐다. 당시 안경신의 나이 스물 셋, 뱃속의 아이는 7개월 째인 상태였다.

거사 이후 숨어 지내다가 출산 직후인 1921년 3월 경찰에 체포된 안경신은 사형을 구형받았다. 이에 김구와 장덕진 등이 “평남도청 폭탄 사건은 임시정부 특명으로 광복군 사령장의 지휘 하에 결사대장 장덕진이 동지 수명과 더불어 투탄한 것이며, 안경신은 전혀 무관하니 방면하라”는 내용의 투서를 총독부로 발송했다. 갓난아이가 있는 안경신을 위해서였다.

임시정부 측이 애쓴 끝에 안경신은 2심에서 평양복심법원으로부터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했다. 당시 매일신보에는 평남 경찰부 폭파범으로 안경신이 체포됐다는 기사가 오른 기록이 남아있다.

직접적인 무력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해야한다고 생각한 그는 강인한 투쟁정신으로 직접 일제 통치기관에 폭탄을 투척했다. 안경신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동지들에게 “나는 3․1운동 때도 참여하였지만 그 때는 큰 효과를 내지 못하였다. 그것은 우리 국민의 단결과 힘이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일제침략자를 놀라게 해서 그들을 섬나라로 철수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곧 무력적인 응징 같은, 일회적 효과가 큰 방법이라고 본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안경신의 독립운동 동지 최매지 또한 그의 확고한 항일 의식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독립투쟁가가 많이 있고 여성투쟁가도 수없이 있다. 그러나 안경신같이 시종일관 무력적 투쟁에 앞장서서 강렬한 폭음과 함께 살고 죽겠다는 야멸찬 친구는 처음 보았다. 너무 강폭한 투탄 폭살 투쟁으로 오히려 해를 받는다면 항일투쟁에 가담 활동하지 아니함만 같지 못하게 아니냐고 물으면 그녀는 잔잔한 미소만 띠고 긍정하지 않았다...”

이렇게 민족독립을 위해 자신을 아낌없이 희생했지만 안경신은 출산, 감옥 수감, 부모님의 사망, 아이의 영양결핍과 장애 등의 불행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진다.

안타깝게도 출옥 후 그의 행방에 대한 기록은 없다. 1962년에 국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서훈을 받았지만 유족들의 존재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상태이다.

20세기, 남녀차별이 흔하던 시기에 안경신은 독립운동에는 남녀가 따로 없음을 몸소 보여준 인물이다. 스물 셋 꽃다운 나이에 온 몸을 던져 독립운동에 투신한 그녀의 삶이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저작권자 © 소비자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