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 궁정동 안가와 만주 하얼빈역에서 각각 生 마감

1979년 고 박정희 대통령의 운구가 청와대를 빠져나오고 있다

[소비자경제 칼럼] 1979년 10월 26일 속보로 등장한 말 ‘有故’. 뭔가 큰 일이 발생했다. 그 당시 분위기는 대통령은 박정희 외에는 생각할 수도, 말도 할 수 없는 시대였는데 변화가 생긴 것이다. 10.26사태라 불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궁정동에서 발생한 사건으로 우선 청와대와 담장 하나 사이에 있는 칠궁(七宮)을 살펴봐야 한다. 종로구 궁정동1-1번지. 왕의 어머니지만 후궁이기에 남편인 왕과 함께 위패를 종묘에 모실 수 없는 7명의 여인을 모신 사당이다.

칠궁.

원래는 서울 각지에 흩어져있던 사당을 고종 때 한 곳으로 모았다. 경종을 낳은 장희빈의 사당과 장희빈이 그렇게 싫어했던 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의 사당도 이곳에서는 사이좋게 이웃하고 있다. 사극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기구하고 다양한 여인들의 속 깊은 이야기들이 숨죽이고 있는 곳이다. 청와대 옆집이라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지는 오래다. 

그 안에 커다란 우물이 있는데, 그곳을 궁정동(宮井洞)이라 불렀다. 이 궁정동에 소위 안가라는 곳이 있다. 1만여 평의 땅에 많을 때는 12동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안가는 어떤 곳인가? 주로 술과 여자와 함께 대통령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곳이었다. 다양한 직업을 가진 미모의 여성들을 2명의 마담들이 추천하면 중앙정보부직원이 면접을 보아 대통령의 술시중을 들도록 했다. 대통령이 한 여성들에게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만남을 한차례로 제한했다고 한다.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사건 재연.

이곳에서 믿었던 심복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한자루 권총으로 박정희는 운명을 다했다. 이 총성 소리를 칠궁의 여인들도 들었을 터, 왕을 낳았음에도 왕비가 되지 못하던 7명의 여인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곳은 김영삼 정부 시절, 역사바로세우기란 명목으로 모두 철거하고 무궁화  동산으로 만들어 지금은 그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영문도 모르고 대통령이 사는 집이라 관광버스타고 구경 온 중국인들만 북적거린다.

그런데 그 10월 26일에 일어난 다른 일이 있었다. 70년 전인 1909년 10월 26, 장소는 만주의 하얼빈역이다.

하얼빈 역.

바로 안중근의사가 거사를 일으킨 날이다. 한일 병탄의 원흉인 이토우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민족의 분노를 담아 총알 세례를 안긴 날이다. 우리에게는 통쾌한 일이지만,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성공으로 이끈 대정객을 잃은 날일 것이다.

안중근 의사는 삼흥학교, 돈의학교 등을 열어 교육을 통한 민족개량과 실력양성에 뛰어들었다. 이내 안중근의사는 교육만으로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한계를 통감하고  스스로 총을 들어 일본을 응징하기로 결심한다. 한때 참모중장자격으로 300여명의 의병을 이끌고 국내진공작전도 감행했다. 

일본의 내각총리인 이토우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만주진출과 한국의 보호국화를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초프(V. N. Kokovtsev)와 상의하러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거사를 계획한 것이다. 이토우를  죽여 세계만방에 대한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고, 대한 남아의 기개를 떨치고자 한 것이다.

우덕순, 조도선 등 동지들과 함께 10월 26일 아침 9시 30분경 하얼빈 철도역에 내려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는 이토우 히로부미를 향해 3발의 총을 쏘았다. 
총알은 이토우에게 명중되었으나 혹시 총을 맞은 사람이 이토우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를 영접하러온 주위의 접빈객에게 3발을 더 쏘았다. 가와카미 하얼빈 총영사, 궁내대신 비서관,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다나카 세지 업무이사가 그들이다.  

이토우는 안중근 의사의 총을 맞고 30여 분 뒤 숨을 거두었다. 7발이 장전된 권총의 6발만 사용한 이유는? 남은 1발은 자신의 머리에 쏴 자결하려 마음먹었으나 쏘지 않았다. 법정에서 이토우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를 말하고 대한독립의 의지를 당당히 밝혀야 하지 않겠는가? 그는 총을 내려놓고 “꼬레아 우라(대한국 만세의 러시아 말)”를 세 번 외치고 체포되었다. 이후 사형을 언도받고 이듬해 3월 26일 32세를 일기(一期)로 안타까운 삶을 마감하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

같은 날인데 70년의 격차를 두고 일어난 일이다. 박정희와 이토우 히로부미. 무언가 매우 달라보이다가도 비슷하기도 하다. 박정희 대통령이 관동군의 장교로 있을 때 이름이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그리고 우리나라를 집어삼킨 원흉 이토우 히로부미(伊藤博文). 독재의 뒤안길에서 민주화의 열망이 들풀처럼 일어날 때 운명을 다한 사람, 조국 근대화로 나라를 가난에서 구했다지만 쿠데타라는 수식어를 주홍글씨처럼 달고 다닌 지도자...아마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세월이 갈수록 더욱 다양한 시각에서 이뤄질 것이다.

이토우 히로부미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이끌어 일본의 근대화를 이룬 사람이었다. 하나 선량한 이웃나라의 국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아픔을 준 사람이다. 그도 지나치게 술과 여자를 좋아하여 한 잔 술 걸치면 기생 무릎을 베고 노래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한 민족의 자유를 억압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 나라를 통째로 먹어치운 사람이다. 

박정희와 이토우 히로부미. 태어난 날은 달라도 죽은 날은 같은 이 두 사람이 또 다른 생에서 만난다면 어떤 대화를 나눌까 궁금해진다. 10월 26일을 맞이하면서 궁정동에서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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