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서 항일무장투쟁 가담했지만 이념 대립 속 평가 절하돼

독립운동가 박차정. (출처=두산백과)

[소비자경제=양우희 기자] '잊혀진 독립운동가' 1편에서 소개한 차미리사가 여성계몽, 해방에 온 힘을 기울인 인물이라면 박차정은 직접적으로 항일무장투쟁에 가담한 독립운동가이다. 여성의 몸으로 국내외를 넘나들며 항일무장투쟁에 헌신한 자랑스러운 독립운동가 박차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박차정은 영화' 암살'에 등장한는 김원봉의 실제 아내다. 그녀는 우리나라가 국권을 일제에게 완전히 빼앗긴 1910년에 경상남도 동래에서 태어났다. 박차정의 아버지는 일제의 무단통치에 분노해 1918년 1월, 유서 한 통 만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우국지사였다. 박차정의 외가는 김두봉과 김두전 등 항일 투사면서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인물들이 많았다. 이러한 가계의 영향으로 박차정 역시 어릴 적부터 항일 의식이 강한 분위기 속에서 자랐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박차정의 가족은 모두가 1918년에 설립된 동래성결교회 교인이었다. 큰오빠 박문희는 학생 때 항일학생운동에 투신하고 수년간 목회 활동을 통해 항일사상운동을 전개하다가 의열단 활동으로 2년 간의 감옥생활을 했다. 작은 오빠 박문호는 신간회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의열단의 일원으로 투쟁하다가 일제에 붙잡혀 서대문 경찰서에서 옥사했다. 언니 박수정은 양산 보육원 등에서 선생님으로 일하며 학생들에게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다 병사했다.

박차정은 동래일신여학교에 입학해 부산지방 항일운동에 가담하며 시와 수필로 민족에 대한 불같은 열정과 이상을 표현하곤 했다. 뛰어난 문학적 기질로 문단의 등단을 권유받을 정도였으니 그 실력을 가늠할 수 있겠다. 

그가 본격적으로 항일독립의식을 갖고 조직적 활동을 시작한 것은 근우회 동래지회에서였다. 여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박차정은 근우회 동래지회의 핵심 인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의 연장선에서 이뤄진 서울 여학생 시위 운동을 그가 배후에서 지도하고 있었음이 사료를 통회 확인된다. 이 일로 박차정은 신간회 소속이었던 오빠 박문희와 함께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가 풀려났다. 이후에도 2차 시위를 전개하고자 이화,숙명,배화,근화,실천,정신 등 열 한 개 여학교와 힘을 모았다. 시위 직후 경찰이 근우회를 배후 세력으로 지목하면서 박차정은 다시 한번 검거됐다. 그는 세 번의 심문 끝에 기소되지 않고 풀려났다.

박차정은 두 차례에 걸친 구금과 고문으로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이 때 중국에서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던 오빠 박문호의 연락을 받고 그는 중국으로 탈출했다. 그 시기에 박차정은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만나 1931년엔 결혼했다. 결혼 후에도 박차정 부부는 남경으로 이동해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부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청년투사를 양성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부른 교가와 군가 등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박차정의 문학적 소질로 미루어 볼 때 그가 직접 작사했을 가능성이 있다.

개신교 집안에서 자란 박차정은 항일 의식 뿐만 아니라 남녀평등 의식 역시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조선부녀의 해방을 위해 남녀차별을 없애고자, 여성문제를 해결하고자 앞장섰다. 이런 노력의 일환으로 ‘앞길’이라는 잡지에 여성문제 해결을 위한 글을 기고한 것으로 보인다.

1937년에 중일전쟁이 일어난 뒤 중국 내의 한국 독립운동이 두 갈래로 갈라지게 됐다. 하나는 김구의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한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 나머지는 김원봉의 민족혁명당을 중심으로 한 조선민족통일전선연맹이었다. 이 시기 박차정은 한국에 머물면서 만국부녀대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해 국제사회에 우리의 입장을 알리고자 힘을 썼다.

중요한 점은 중국 관내의 항일투쟁이 두 갈래로 나뉘었다고 해서 박차정이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과 등진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박차정은 임시정부에 특사로 파견돼 대일본 라디오방송을 했고, 안창호의 장례식에도 참석했다.

박차정은 1939년, 중국에서 치러진 곤륜관 전투에서 입은 부상으로 1944년 5월 27일 순국했다. 적진 앞에서 메가폰을 이용해 선전활동을 전개하다 공격받은 것이다. 병석에서 자신이 직접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던 박차정은 조국해방을 보지 못하고 3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골은 남편 김원봉이 국내로 돌아올 때 피 묻은 군복과 함께 가족들에게 전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부부사이에는 아이가 없었고 김원봉은 48년 남북협상 때 월북한 뒤 김일성의 정적으로 58년에 숙청됐다.

북한에서 생을 마감했기에 남편 김원봉은 대한민국에서 국가 차원의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안타까운 점은 박차정 역시 남북분단으로 인한 극한의 이념대립 상황 속에서 독립운동가보다는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기독교 단체들도 대중을 장악하기 위해 대중운동과 노동운동을 전개했던 점을 감안하면 이를 민족해방운동 전개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다. 박차정은 절친한 동료였던 허정숙이 민족투쟁보다 계급투쟁을 우선시하자 단호하게 결별한 사실은 그의 가치관이 민족해방에 기울어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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