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히젠도

[소비자경제 칼럼] 10월 중순에 접어드니 산과 들, 강과 바다가 더욱 아름답다. 특히 요즘 고궁은 색색으로 물든 단풍과 청량한 하늘빛, 그리고 수백 년의 이야기를 속삭여줄 것 같은 궁궐의 부드러운 처마가 어우러져 우아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 아름다움도 잠시, 10월 8일이 되면 궁궐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되새기게 된다. 1895년 10월 8일에 일어난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明成皇后 弑害事件)이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불린다.

덕홍전

경운궁(덕수궁)엔 덕홍전이라고 있는데 그 자리가 원래는 경효전으로 명성황후의 혼전(魂殿)이었던 곳이다. 혼전은 왕이나 왕비가 종묘에 합사하기 전까지 위패를 모시는 공간을 말한다.

일본은 청일전쟁으로 조선에서 청나라를 몰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러나 극동에서 그들의 지배력이 커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일본을 견제하게 되니 일명, 3국간섭이다.

전쟁의 대가로 어렵게 할양받은 요동반도를 다시 내놓게 된다. 이에 명성황후는 러시아에 손을 내밀고 일본군에 의해 훈련시킨 훈련대도 해산코자했다.  일본의 입장에서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셈이었다.

전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우루는 이토히로부미의 친구로 메이지유신을 성공적으로 이끈 인물로서 일본의 외상을 역임한 거물급 정치인이다. 이노우에 가오루의 조종하에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는 이 국제정세의 국면을 만회하기 위해 명성황후를 시해할 계획을 세우니 일본이라는 한나라의 도덕적 판단 기준이 조폭수준으로 몰락하는 순간이었다.

미우라 고로

이 사건의 행동대원이 필요했다. 미우라는 하수인으로 한성신보사(韓城新報社)의 사장 아다치(安達)와 행동대원들을 공사관으로 불러 6000원의 거사자금을 주고 명성황후 시해의 전위대로 삼았다. 

일본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훈련대의 우범선(禹範善)·이두황(李斗璜)·이진호(李軫鎬) 등 3대대장과 전 군부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를 포섭하여 작전을 개시하였으니 이른바 여우사냥이다.

 

 

명성황후로 추정되는 사진. 그러나 학계에서는 왕족의 복장이 아니라는 입장이 대다수다.

또한 명성황후와 관계가 좋지 않았던 흥선대원군을 참여시키는데 지금의 마포 동도공고자리에 있었던 아소정(我笑亭)에 있던 그를 끌어들여 사건이 탄로날 경우 그를 배후조정자로 삼으려한 것이다.

흥선대원군을 태운 가마와 일본의 낭인무리들은 서대문에서 조선훈련대와 합류해 광화문에 이르렀다. 훈련대 연대장으로 1중대 병력으로 왕궁호위를 맡았던 홍계훈을 칼로 쳐 죽이고 군부대신 안경수마저 죽이고 경복궁에 난입하게 된다. 이를 저지하던 궁내부대신 이경직도 일본의 칼에 죽으니 세자, 힘없는 궁녀, 명성황후만 있을 뿐이었다. 세자를 밀쳐내고 명성황후를 찾아 수차례 칼로 난자하였다. 시체를 녹산에서 태우고 경회루에 재를 뿌렸다.

을미사변이후에 고종은 남산북쪽 기슭에 죽은 이를 위한 사당을 짓고 봄여름으로 제사를 지내니 장충단(奬忠壇)이다. 장충단은 지금의 국립묘지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좌) 이전의 장충단 (우)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장충단 공원

일제는 이곳을 훼파(毁破)하여 공원을 만드니 장충단 공원이 되고, 안중근의사에게 죽은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찰을 짓는다. 이등박문(伊藤博文)에서 박문(博文)을 붙인 이름인 박문사(博文社)다. 이 박문사를 지을 때 경희궁의 흥화문과 경복궁의 선원전건물을 떼어다 붙이니, 몸 바쳐 나라를 지킨 지하의 영혼들이 통탄할 일이다.

당시 명성황후를 절명(絶命)시킨 칼 히젠도(肥前刀)가 일본 후쿠오카에 있는 쿠시다 신사에 아직도 보관돼 있다. 나무로 만든 칼집에는 ‘일순전광자노호(一瞬電光刺老狐)- 늙은 여우를 단칼에 찔렀다’라고 새겨져 있다. 히젠도는 16세기 에도시대 다다요시(忠吉)란 장인에 의해 만들어진 칼로 전쟁용 무기가 아닌 애초에 살상용으로 만들어진  길이 120㎝, 칼날 90㎝의 칼이다.

히젠도

이 칼은 1908년 토오 가츠아키(藤勝顯)가 신사에 기증했는데 그는 사건 당시 왕비의 침전에 침입한 세 사람 중 한명이다. 그는 사건이후에 양심에 가책을 느껴 사찰에 이 칼을 맡기려했다. 그러나 사람을 죽여 살기가 너무 짙은 칼을 절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하여 신사에 보관시킨 것이다.

이토록 무시무시한 사건이  120여 년 전 이 땅, 그것도 왕궁의 한 복판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니 감회가 새롭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았던 세자 순종 과 세자비 순명왕후는 충격으로 돌아가셨다. 우리도 그 순간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이 사건의 모든 과정을 마음속에 되새기는 것이 이 땅에 사는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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