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가 막역지우 정병욱에게 건낸 '서시'가 보관되고,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흔적들

[소비자경제 칼럼] 최근 북촌의 포화와 유효성으로 인해 서촌이 뜨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서촌을 대표하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다. 아마도 조선시대엔 겸재 정선이라면 근대에는 누가 뭐라 해도 윤동주일 것이다. 또 최근 개봉한 ‘동주’로 인해 서촌을 찾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윤동주가 태어난 북간도에도 많은 사람이 찾는다지만 윤동주의 흔적이 이곳 서촌에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인왕산중턱에 위치한 시인의 언덕이 들어서면 더욱 그러하다. 통인시장 앞 팔각정 쉼터에서 수성동계곡으로 올라가다보면 윤동주 하숙집터를 만날 수 있다.

▲ 옛 윤동주 하숙집터의 현재 모습.

태평양전쟁으로 일본이 수많은 젊은이와 물자를 전쟁터로 내몰던 1941년 5월, 이때는 일본이 조선을 병참기지화한 시기였다. 가난한 농촌의 놋숫가락까지 공출해가는 전쟁 막바지의 비참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다. 연희전문 문과생이었던 윤동주도 이러한 시대상황을 비껴갈 수 없었다. 전쟁식량을 조달하느라 기숙사의 식사가 너무도 부실하여 늘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살 수 밖에 없었다.

마침내 2년 학교 후배 정병욱과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나선다. 어디가 좋을까 물색하다 경치 좋은 곳에 이르렀으니 그곳이 인왕산 기슭이었다. 윤동주는 인왕산 아래 여러 집들을 두리번거리고 있다가 국문과 김송교수의 문패가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 집에서 그해 9월까지 하숙하게 된다.

김송의 아내는 성악가로 식사를 물린 후에 언제나 교수부인이자 하숙집아주머니로 가곡을 불렀다고 한다. 그 후에는 윤동주의 시낭송. 시와 음악을 주거니 받거니, 경치 좋은 곳에서 시인묵객들이 술 한 잔 놓고 시조를 서로 읊는듯한 최고의 시간이었다. 인왕산의 기슭에서 당대 최고의 음악가와 최고의 서정 시인이 벌이는 낭만의 향연이 이어졌다.

대청마루에 느긋하게 앉아 차를 마시며 음악과 문학을 논하는 깨어있는 지식인교수와 음악가, 시인의 모습이 그려진다. 아침에 눈을 뜨면 정병욱과 수성동계곡을 지나 인왕산 오솔길을 따라 지금의 시인의 언덕, 윤동주 문학관까지 산책을 갔다고 한다. 젊은 시인 윤동주가 누릴 수 있었던 마지막의 호사가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은 이후 윤동주의 고통스러운 삶을 보면 알게 된다.

요시찰인물인 김송교수의 가택수사등 일본고등계형사의 집요한 사찰에 이곳의 생활은 4개월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곳에서의 삶은 윤동주에게 주옥같은 많은 시편을 생산해낸 시기가 됐다. 말을 하면 그것이 시가 되고 낙서가 곧 시편이 되는 그런 시기였다. 별 헤는 밤, 자화상 같은 시편들이 이곳에서 줄줄 쏟아졌다. 이 시편들을 모아 시집을 만들었다. 그 시집의 첫 장이 그 유명한 ‘서시’이다. 3권을 손으로 엮어 한권은 소장하고 한권은 지도교수, 영문과 교수인 이양하에게, 한권은 정병욱에게 주고 윤동주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 (좌) 인왕산 인근에 위치한 윤동주 문학박물관.

  (우) 시집 '서시' 표지 모습.

이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알려졌을까? 일본 학병으로 떠날 때 정병욱은 섬진강가에서 술도가를 운영하는 어머니에게 잘 보관하라고 신신당부하며 윤동주의 시집을 맡겼다. 정병욱의 모친은 어디에 둘까 궁리하다가 항아리에 시집을 넣고 마루를 뜯어 그 아래에 보관해 두었다. 그 뒤, 윤동주는 해방을 몇 개월 앞두고 일본의 생체실험으로 희생된다.

그리고 몇 년 뒤인 1948년 경향신문 편집국장인 정지용에 의하여 그 시집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하숙집에서 함께 살았던 정병욱이 모친에게 시집을 맡기지 않았다면 우리는 윤동주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들이 하늘과 별을 보며 외우던 온 국민의 애송시 ‘서시’같은 것을 말이다.

인왕산 라인을 따라  걸으면 15분정도, 이윽고 시인의 언덕에 이르게 된다. 이 언덕에 이르면 윤동주문학관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2009년까지 수도가압장으로 쓰던 곳이다. 고지대의 사람들에게 수돗물을 공급하기 위해 1974년에 지은건물인데 낡은 이건물을 종로구청에서 사들여 관리실과 기계실을 고쳐 윤동주문학관으로 사용하기로 했다.

재미있는 것은 설계를 마치고 공사에 들어가는데 때마침 내린 비로 수도가압장의 엄청난 물탱크를 발견하게 됐다고 한다. 이 탱크를 어떻게 활용할까 고심하였다. 비록 55제곱미터의 작은 공간 이지만 높이가 5미터나 되는 깊은 건물이다.

▲ 박물관에 전시중인 윤동주 생가 우물.

건축가는 이 물탱크를 윤동주의 시세계와 접목시켰다. 윤동주의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우물이라는 시상과 연결된 공간으로 탈바꿈 시킨 것이다. 이곳 문학관에는 시인을 생각하게 하는 많은 사진과 글들이 있다. 전시실 한가운데는 시인의 생가에 있던 복원된 우물이 있다.

물탱크였던 3전시실에 들어서면 물 냄새가 나는데 이것이 투명하게 살고자했던 윤동주의 냄새가 아닐까한다. 더 크고 웅장하게 지었더라면 우리는 이곳에서 박제된 시인의 모습밖에 보지 못했을 것이다. 캄캄한 전시 공간에서 윤동주를 생각하고 나오니 이제 나도 시인이 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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