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위상궁 엄상궁, 고종의 승은을 받다

▲ 즉조당.

[소비자경제 칼럼] 즉조당에는 대한제국기를 오롯이 살아낸 한 여인의 이야기가 숨어있다. 여기서 한 여인이란 바로 명성황후의 비서실장격인 시위상궁을 한 엄상궁, 순헌황귀비를 말한다. 순헌황귀비는 못생긴 엄상궁으로 통한다.

명성황후와 함께 격동의 조선말을 헤쳐 나가던 인물로 가난 때문에 4살이라는 어린나이에 궁궐에 들어가 고종의 승은을 받은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궁궐에 난리가 났다. 중전 민씨의 눈꼬리가 매섭게도 한껏 올라갔다. 국가가 정상적인 상황이면 왕에게 승은을 받는 것은 장려할 일이고 궁녀 개인에게도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지만, 대원군을 몰아내고 고종을 즉위토록 한 중전 민씨의 힘이 궁궐뿐 아니라 온 나라, 아니 세계의 정치판에도 영향을 미칠 때인지라 궁녀, 그 중에서도 자기가 그토록 믿어 몸종 부리듯 했던 엄상궁의 행동을 그대로 참아줄 리 만무했다.

형틀에 매달아 무섭게 고문하려던 찰라 수더분하고 맘씨 착한 공처가, 고종이 겨우 사정사정해서 죽음을 모면했다.

궁궐밖 10년의 세월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른다. 아마 참혹한 시련기였을 것이다. 다시 고종의 부름으로 궁궐에 들어오게된 것은 명성황후의 사후 5일만의 일이었다.

▲ 엄황귀비.

무엇이 고종으로하여금 상궁 엄씨를 부르게 하였는지 사진을 보면 아무리 양장을 한껏 차려입어도 여자로서의 매력은 풍기지 않는다.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이다. 고도의 두뇌와 빠른 판단력 및 친화력, 또한 고종에게 없는 배짱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아관파천, 환궁, 대한제국선포, 러일전쟁, 을사조약, 정미7조약, 고종의 퇴위, 국망 등 우리나라 역사의 가장 힘든 시기를 고종과 함께 헤쳐 온 동력으로 작용했다.

또한 힘겨운 시절 고종의 뒤에서 때로는 위로하며 마음을 다독거려주기도 하고 강하게 내몰기도 하면서 주위의 아무도 믿을 수 없던 시절 고종의 친구가 돼 주었다.

지금으로부터 120년전 병신년에 일어났던 아관파천을 보면 친러파인 이범진, 이완용과 공모해 경복궁에서 고종과 순종의 탈출을 실행했던 일이 있다.

거사 전 가마를 타고 궁궐출입을 자주했다고 한다. 궁궐직이들에게는 나갈때마다 몇꾸러미의 행하(일종의 수고비)를 주었다. 무료하게 궁궐지키는 군인들은 처음에 경계를 하다 행하의 맛에 빠져들어 엄상궁의 궁궐출입에 대해 아무런 반감이 없었다.

드디어 1896년 2월11일 새벽 가마 두개가 경복궁 건천문을 빠져 나왔다. 앞의 가마에는 엄상궁이 바짝 출입문에 앉았고 뒤에는 고종이 몸을 숨겼다.

뒷가마에는 다른 궁녀가 가마문 앞에 버티고 앉아 순종이 뒤에 바짝 숨어있었다. 건춘문을 통과한 두 개의 가마는 새벽공기를 가르며 미공사관을 지나 무사히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했다.

공사관에는 이범진과 이완용을 비롯한 친러파 대신들이 인천에 정박해있던 러시아함선에서 그 전날 미리 출동시킨 수군 120명의 군인들이 삼엄한 경비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엄상궁의 지모와 배짱이 아관파천을 보기 좋게 성공시킨 것이다.

아관은 러시아 공사관을 얘기하는 것이고 파천은 왕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두고 병신년에 일어난 일이니 “왕이 병신됐네, 병신됐네”하면서 장안의 아이들은 놀렸지만 고종으로서는 어찌 할 수 없는 결단이었다.

공사관에서는 4개의 방을 배정해 주었다. 1개의 방에서 왕과 순종이 함께 기거하고 1개의 방은 침실로,1개는 엄상궁의 방이요, 나머지는 궁녀들의 방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높디높은 구중궁궐을 떠나 좁은 러시아공사관의 생활이 엄상궁에게는 여자로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 아니었을까 생각 한다.

1897년 10월생인 영친왕을 갖게 된 것이다. 1년후인 1897년2월20일 환궁을 하게 되는데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으로 오게 된다. 엄상궁은 영친왕을 낳은 뒤에 귀인으로 봉해지고 세자로 책봉된 뒤에는 황귀비로 봉해졌다.

그 엄황귀비가 승하한곳이 즉조당이다. 영친왕은 볼모성 유학으로 1907년 12월에 일본에 보내졌다.

영친왕의 태자태사였던 이토 히로부미는 방학이 되면 영친왕을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감감 무소식에 화가 난 엄비는 당시 총독인 데라우치에게 무섭게 항의하였다.

데라우치는 궁궐을 나와서 마음을 다스렸기 망정이지 안 그러면 큰 사고 칠 뻔 했다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금지옥엽으로 키운 영친왕을 일본에 보내고 더 힘든 국망의 시기인 경술국치를 지난 이듬해인 1911년 엄상궁은 이곳 즉조단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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