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준명당.

[소비자경제 칼럼] 우리는 근대사를 너무 모른다. 우리의 역사가 근대로 넘어오면서 많은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고난을 되새겨 슬기롭게 교훈을 얻으려는 시도보다는 회피하고 왜곡 시키다보니 인식의 차이가 생겨 아예 안 가르친 것이다. 그러니 당연이 모르는 수 밖에...

역사는 아주 당연하게 부정적인 것, 비굴한 것, 슬픈 것 들이 혼재한다. 성경을 보시라. 이스라엘의 찬란한 이야기만 있을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다윗의 간음이야기, 노아 할아버지의 술먹고 실수한 이야기, 롯이 딸과 통간한 이야기 등 함께 읽기에 거북한 이야기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이 고스라니 드러날 때 그곳에서 지혜가 생기며 별 수 없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그것이 발전하여 인간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생기는 것이다.

요즘 한창 떠오르는 역사적인 인물이 있다. 덕혜옹주. 덕혜옹주에 대해서 얼마나 아시는지? 오늘 살펴보는 준명당의 주인공이 덕혜옹주다. 덕혜옹주와 준명당(浚明堂)?

눈을 밝게 하여 국가 정사를 살핀다는 뜻이다. 중화전이 1902년에 완공되었으니 중화전을 세우기 전에는 즉조당(卽阼堂)을 정전으로, 준명당을 편전으로 사용했다. 그런데 이곳 준명당에는 가슴 아픈 비운의 주인공의 사연이 담겨있다. 계단위의 기단을 보시라. 홈이 파져 있다.

그 홈은 난간의 흔적인데 어린아이들이 밖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장치였다. 무슨 용도로 쓰였을까? 유치원이다. 덕혜옹주가 다녔던 유치원의 흔적으로 보면 된다. 고종에게는 9남4녀의 자식이 있었지만 장성 할 때까지 살아남은 자식은 순종, 의친왕, 영친왕, 덕혜옹주 4명뿐이다. 명성황후는 4남 1녀를 두었지만 모두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순종만 살아남았다.

▲ 난간을 설치했던 홈.

순종도 사실 몸과 정신이 병약한 분이었다. 아기를 낳을 욕심으로 명성황후가 여러 가지 한약과 효험이 좋은 약들을 많이 지어 먹어서 그렇다는 얘기도 있다.

1912년 5월 25일, 경운궁에 아기울음소리가 크게 울렸다. 나라를 잃은 음울한 기운이 경운궁에 깔려있을 때, 60세인 고종의 고명딸이 태어난 것이다. 을미년 참화로 명성황후를 잃고 1911년 실질적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엄황귀비마저 먼저 보내야 했던 고종이 할 일 없이 궁녀 저 궁녀를 보아오다가 키크고 얼굴 이쁜 양귀인을 만나 낳은 아기였다. 양귀인을 福寧堂으로 봉하고 옹주를 ‘봉령당 아기씨 阿只氏’로 부르게 되었다. 德惠라는 이름을 받은 것은 한 참 후의 일이다.

나라를 잃어버린 군주로서의 죄책감과 텅빈 궁궐에서 아무 할 일도 없던 폐위군주 고종에게 덕혜옹주의 탄생은 삶의 근거요 희망이었다. 그것은 만백성의 꿈이었다.

고종은 왕의 체통도 잊은 채 산후조리와 수유에 힘들어하는 복령당 양씨와 변복동유모의 불편함도 잊은 채 조석으로 아기를 보러 다녔다. 급기야는 본인의 침전인 함령전으로 아기를 데려왔다.

그 후 4살 때에 일본인교사를 채용하고 여러 대신들의 자녀 7, 8명을 불러 모아 유치원을 개설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유치원이 아닐까? 어린 나인들과 유치원동무들은 덕혜옹주를 아기씨로 부르며 극진하게 따라다녔다고 한다.

옹주는 침전인 함녕전에서 아무나 탈 수 없는 4인교 가마를 타고 오직 현자만 출입다는 유현문(唯賢門)을 지나 준명당으로 매일 등교했다. 고종은 여느 아버지들처럼 덕혜옹주의 준명당에서 펼쳐지는 덕혜의 재롱잔치를 보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

그런데 이 모녀에게 역사의 격랑은 피할 수 없는 것인가! 어린 덕혜의 버팀목인 고종이 1919년 1월 원인도 모르게 갑자기 돌아가신 것이다. 그 후 거처를 경운궁에서 순종이 계신 창덕궁 관물헌으로 옮겼다. 3년상을 치르고 소학교 2학년에 편입하는데 지금의 충무로 극동빌딩자리에 있었던 일출심상소학교이다.

진고개라 불리는 충무로지역은 일인들의 주거지였다. 지금의 세종호텔지역이 진고개였는데 인왕산이 바위산(骨山)인데 반하여 남산은 흙산(土山)으로 비가 오면 땅이 질어 진고개라 하였다. 이곳이 임진왜란 때부터 왜군들이 거주하여 왜성대라 불렀으며 임오군란이후부터 일본인들의 주거지가 되었다.

이 곳에 일본인 자녀들을 위한 소학교가 개설되어 있었다. 덕혜는 시와 음악에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고한다. 많은 동시를 지었는데 그 동시에 일본의 저명한 작곡가 흑택융조등 최고의 작곡가들이 곡을 붙여 동요가 되어 아직까지 전해온다고 한다. 그 동시 중에 한 가지를 소개한다.

 

제목 <비>

모락모락 모락모락

검은 연기가 하늘궁전에

올라가면 하늘의 하느님

연기가 매워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있어

 

이때 덕혜를 만난 한 동요 작곡가는 덕혜옹주에 대해 “총명하고 기억력 좋은 고아하고 단아한 자태에 놀랐다”고한다. 시의 여왕으로까지 불리며 일본에서도 명성을 떨치던 덕혜옹주에게 시련이 닥치는 것은 소학교 6학년 때인 1925년 일본의 학습원으로 유학을 가면서부터이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병탄하면서 2가지의 큰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첫째는 국가의 존엄인 왕의 궁궐을 훼파(毁破)하는 것이요. 조선의 황족을 일본의 황족이나 화족과 결혼시켜 혼혈화(混血化)하는 것이었다.

▲ 일출심상상소학교 사진첩의 덕혜옹주.

영친왕 이은을 비롯하여 의친왕의 아들 이건, 이우가 이미 일본에 볼모성 유학을 가 있는 상태에서 이제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 마저 일본의 황족과 귀족의 자녀들만 보내는 여자 학습원에 보낸 것이다.

그런데 사실 덕혜옹주는 일본문화에 대해서는 큰 거부감은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태어난 시기도 나라가 일본에 합병된 시기요. 일본 가정부에게 일본어를 배웠고 유치원과 소학교에서 일본 선생님에게 공부하였다. 일본에서도 동시를 잘 쓰는 시의 여왕이라 칭송하여 덕혜의 존재가 일본에 이미 많이 알려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다만 아버지인 고종의 붕어와 순종과 순종비와의 이별 등 예민한 사춘기 소녀의 시절에 겪는 아픔과 정신적 방황이 큰 짐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글을 쓰다 보니 너무 길었다. 덕혜옹주의 기구한 역사를 어찌 몇 줄로 다하겠는가? 일본 유학의 얘기는 다음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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