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경제=이명진 기자] 올 초까지 흥미롭게 봤던 드라마가 있다. ‘분노조절장애’라는 사회적 이슈를 접목시켜 방영된 ‘리멤버-아들의 전쟁’이다.

극중 분노조절장애를 가진 남궁민(남규만 역)은 악역을 실감 나게 연기하며 극의 몰입도를 높였다. 남궁민은 당시 한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극중 캐릭터에 몰두한 나머지 실제 분노조절장애를 경험한 적이 있다고 밝혀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상대적 박탈감과 함께 우울한 사회 현실 등이 드라마 속 캐릭터에 고스란히 녹아나 있는 현실에 씁쓸함을 금할 수 없다.

최근 현대인들은 분노, 불안, 증오와 우울 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 상처들은 마음속 깊이 억압된 채 오랫동안 쌓이고 축적돼 결국 장애라는 병을 유발한다. 이는 더 심해지면 일명 ‘묻지마 살인사건’ 등 끔찍한 범죄로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노인에게로 돌아간다.

물론 일각에서는 언제, 어느 사회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상적 일이라 생각하며 그냥 지나쳐 버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짚고 넘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지난 5월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20대 여성이 공용화장실에서 아무런 일면식도 없는 남성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사건이다. 피의자는 범행동기에 대해 “여성들이 공격적이다. 여성들이 나에게 경쟁의식을 가져 그랬다”라며 범행 이유를 실토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던 ‘여성혐오’에 대한 문제 제기가 불거지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분노를 느끼며 거리로 나서고 있는 주체는 젊은 여성이다.

범죄의 끔찍함 앞에 ‘나와는 상관없어’ 식의 대응은 이제 옛말이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나도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회적 불안감과 공포감이 조성된 결과다. 이러한 불안감으로 여성들은 소리 모아 ‘여성혐오’를 고발하고 나섰다.

하지만 정작 검찰은 논란이 됐던 ‘여성혐오’ 범죄 여부에 대해 단지 정신질환 증세로 평소 여성에 대한 비하나 차별 같은 일관된 신념은 확인되지 않는다고 규정해버렸다. 여기서 '여성혐오에 대한 사회적 심각성을 일부 축소시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여성혐오는 오랜 가부장적 사회에 깊이 내재돼 있다. 남녀평등과 여성 권익 상승이 중요하다는 담론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 사회 인식 및 여성들의 현실은 지금까지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

그동안 여성을 향한 범죄가 발생했을 때 대부분의 사회적 인식은 ‘그러게 왜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냐’, ‘옷차림이 그래서 그런 거다’ 등 책임의 소재가 늘 피해자인 여성에게로 돌아갔다. 피해자인 여성의 문제를 거론하며 오히려 “피해자가 되지 말라” 당부한다.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만 하더라도 ‘그 시간에 거기 있었으면 정상적인 여자가 아닐 텐데’라고 말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아직도 가해자의 입장에서 피해자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말이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사회적 약자가 더 작은 약자에게 불안을 투사하는 사회적 심리가 팽배하다. 이번 사건에서 여성들의 분노와 추모 열기에 일부 남성들은 자신들을 왜 잠재적 범죄자로 만드느냐며 반발한다. 아마도 ‘혐오’란 단어의 표면적 의미에서 느껴지는 그릇된 여론이 싹튼 결과라 생각된다.

여성 성희롱, 성폭력 사건이 줄을 잇는 요즘이다. 인기 연예인들의 성폭력 피소사건과 여성혐오를 드러낸 노래가사가 발매되는 등 매체를 통해서도 충분히 그 심각성을 느낄 수 있다.

강력범죄 피해자 중 여성의 비율은 실제 90.2%(2013년, 경찰청기준)로 여성의 안전이 취약한 상황이다.

정부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이유 없이 노인과 여성, 아동 등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폭력을 휘두른 경우 초범이거나 피해자와 합의를 했더라도 강력히 구속 수사할 방침이라 발표했다.

그러나 매번 가십성으로 사건 덮기에만 급급한 정부의 눈 가리기식 대응은 이제 사라져야 한다.

모두 안전하고 평등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우선 성차별적 인식 구조의 개선과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시민의식이 필요할 때다.

 

이명진 기자 npce@dailycn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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