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신상실·미약 감형, 책임 없으면 형벌 없다는 ‘책임주의’ 대원칙 근거

[소비자경제=서예원 기자] 흉악 범죄 사건에서도 정신질환으로 인한 심신상실,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 등을 이유로 범죄지가 가벼운 처벌을 받고 풀려나는 사례가 많아 ‘면죄부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해 내려질 판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서울 강남역 인근에서 일어난 ‘화장실 살인사건’으로 정신질환자 범죄 예방·관리의 중요성이 화두가 되자 최근 경찰이 범죄를 일으킬 우려가 있는 정신질환자의 입원치료를 적극 추진하기로 했다.

국가적 차원에서 정신질환자를 관리하기 위한 보다 적극적이고 선진화된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의사처방 지시를 잘 따라서 끝까지 약을 복용하고 인지치료를 할 필요성이 있다”며 “보호수용제라던가 강제 치료명령제를 실효화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 강남역 살인사건, 정신질환자 범행 결론

현행 경찰관 직무집행법에 따르면 정신착란을 일으키거나 술에 취해 자신이나 남의 생명·신체·재산에 위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이는 의료기관 등에 긴급구호를 요청하거나 경찰관서에 두고 보호할 수 있다.

정신보건법 역시 범죄를 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의심되는 정신질환자를 경찰관이 발견하면 지자체장에게 해당 인물의 진단과 보호를 신청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는데, 이를 행정입원이라고 부른다.

이에 경찰관이 정신질환자의 범죄 위험도를 객관적으로 진단할 체크리스트를 만들어 일선에 배포할 계획이다. 또 정신질환으로 입원치료를 받다 퇴원한 사람이 치료 중단 후 증상이 심해져 범죄를 일으키는 일이 없도록 집중 관리하기로 했다.

강신명 경찰청장은 최근 정신질환자 범죄 예방 대책을 발표하며 “정신질환자가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는지를 현장에서 일선 경찰관들이 판단할 수 있도록 체크리스트를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강 청장은 “심리학 전문가인 범죄심리분석관(프로파일러)들로 구성된 태스크포스(TF)를 구성, 정신질환자 범행 사례를 유형과 특징별로 체계화할 방침”이라며 “성범죄 재발 우려자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것처럼 범죄를 저지를 소지가 있는 정신질환자의 정보도 병원 등과 협력해 체계적으로 관리할 방침”이라고 설명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살인·강도·강간·절도·폭력 등 5대 중대 범죄를 저지른 정신질환자는 4517명이었다. 2012년 3314명에서 매년 300~500명가량씩 늘어나고 있다.

범죄 유형별로 보면 강간·강제추행 등 성범죄자가 가장 큰 폭으로 늘었다. 지난해 성범죄자는 450여명으로 3년 새 50% 가까이 급증했다. 지난해 살인을 저지른 정신질환자도 66명으로 2012년(65명)보다 늘었다.

특히 ‘묻지마 범죄’ 상당수가 정신질환자에 의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경찰청 범죄분석요원이 지난 10년간 발생한 대표적인 묻지마 범죄 21건을 분석한 결과 13건(62%)이 정신질환자의 소행이었다.

▲ (자료제공=경찰청)

최근 전 국민들의 분노를 산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구속된 김 모(34)씨 역시 2008년부터 네 차례 입원한 병력이 있고, 지난 1월 퇴원한 이후 약을 제대로 복용하지 않아 증세가 악화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벌써부터 많은 누리꾼들은 김씨의 정신병력이 ‘감형의 구실’이 될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정신질환자가 벌인 강력 범죄의 경우 ‘심신장애’나 ‘심신미약’을 이유로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 “심신상실의 상태였으므로…” 책임주의 원칙에 근거한 감형

형법 제10조에 따르면 심신장애로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결정 능력이 없는 사람은 처벌하지 않고, 술 등으로 인해 심신이 미약한 사람에 대해서는 형을 감경한다.

심신장애가 있는 자의 범행을 처벌하지 않거나 감형해 주는 이유는 그들에게 책임능력이 없어서다. 우리 형법이 책임이 없으면 형벌이 없다고 하는 ‘책임주의’를 대원칙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법적인 책임을 완전히 인식하고 있지 못한 사람이 저지른 불법은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다.

지난 2008년 여아를 끔찍한 방법으로 성폭행한 조두순이 ‘만취에 따른 심신 미약’이란 이유로 무기징역에서 징역 12년으로 감형 받았고, 2014년 부산의 한 사회복지관에서 두 살배기 아기를 3층에서 던져 살해한 가해자는 자폐증을 앓는 ‘발달장애 1급’ 환자로서 심신상실 상태였던 점을 감안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지난해 동거녀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50대 남성 역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가 조현병(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다는 이유로 감형, 징역 12년이 확정됐다. 당시 재판부는 “가해자가 조현병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흥분상태를 제어하지 못해 범행을 저지른 점을 고려했다”고 설명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국내에선 고의로 범죄를 저질러놓고 정신병이나 만취 등의 심신 장애를 감경 사유로 악용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에 정신질환이나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상실 범죄자를 감형할 게 아니라 치료를 거부하거나 단순히 술을 마시고 감정이 격해져 죄를 지었다면 오히려 가중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심신상실이나 심신미약 등이 감형 사유로 악용되면 범죄는 늘어날 수밖에 없고, 제재 수위가 낮다면 사회 전체의 안전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심신장애에 대한 판단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도 문제다. 전문가의 의견이 참고 대상이 되지만 최종 판단은 법관이 내리기 때문에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법조계 한 관계자는 “심신장애의 경우 고려해야 할 부분이 많아 현실적으로 판단이 매우 어렵다”며 “그렇다보니 국민들의 감정과 동떨어진 판결이 나오는 사례가 종종 있다”고 말했다.

판사가 형을 선고할 때 법에 정해진 형과 감경 또는 면제사유만을 고려하는 것은 아니다. 판사는 해당 사건에 적용되는 법에 정해진 형에서 감경 등을 한 처단형의 범위 내에서 정상을 고려해 범죄자의 형을 정한다.

이때 판사들에게 기준이 되는 것은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정한 양형기준표다. 판사는 양형기준표에서 정하고 있는 가중 또는 감경 사유까지 고려해 형을 선고하게 된다.

◆ 정신병력이 면죄부?…스스로 책임무능력상태에 빠졌다면

그러나 정신질환자의 건강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형벌 감경을 무조건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안성훈 한국형사정책연구원 형사법연구실 연구원은 “현행법상 심신상실의 정신질환자는 반드시 감형하도록, 심신미약의 경우 이를 참작해 감형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신질환자에 의한 묻지마 범죄는 이전부터 많이 논의돼 온 부분”이라며 “많은 여론이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을 두고 분개하고 일찍이 감형을 우려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러한 규정을 왜 만들었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형법 제10조에 따르면 심신장애로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결정 능력이 없는 사람은 처벌하지 않고, 술 등으로 인해 심신이 미약한 사람에 대해서는 형을 감경한다. (출처=픽사베이)

실제 정신분열증을 앓는 환자의 경우 살인하라는 환청을 듣고 범행을 저지르기도 해 완전히 정신질환자 범죄를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안 연구원은 “국가가 나서서 정신적 질환이나 장애 등을 파악해 이들을 조기발견하고 지원해야 하는데 그게 잘 안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이러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모든 정신질환자를 잠재적인 범죄자로 볼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일각에선 단순히 심신상실이나 심신미약이라고 해서 무조건 면죄부를 줄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판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변원규 백석대 법행정경찰학부 교수는 “심신이 온전치 않은 상태에서 범행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거나 형을 감경하는 판례는 많다”면서도 “개인적으로는 범행을 저지른 자에 대해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생각한다”며 소신을 밝혔다.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란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자기를 책임무능력 상태에 빠뜨려 그 상태에서 범죄의 결과를 일으키는 행위를 말한다.

변원규 교수는 자신이 음주를 절제하지 못해 스스로를 심신미약의 상황으로 만든 경우 일반적인 감형 사유와는 달리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논리를 정신질환자에도 적용, 주로 정신병력이 있는 피고인들이 법적에서 감형을 주장하는 그동안의 사례들이 모순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공황장애, 분노조절 등 이미 정신질환임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치료를 게을리 했다는 것은 명백히 자기책임을 회피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변 교수는 “정신질환이 다른 질병과 달리 타인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음에도 적절한 보호 요청이나 치료를 회피한 것은 ‘스스로 원인에 있어서 자유로운 행위’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치료를 꾸준히 하지 않고 자신을 방치해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결과가 발생했다면 결코 선처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예원 기자 npce@dailycn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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