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연극배우 같다는 생각이 가끔 들 때가 있다. 예컨대 각종 만남에서 가급적 상대방의 입장을 충분히 배려하고 좋은 말, 칭찬, 존경, 찬사를 보내며 상대방이 싫어할 만한 말은 목 언저리에서 멈출 때다. 사람들은 이걸 배려, 에티켓, 겸손 등으로 표현한다.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소설가 박형서는 그의 첫 산문집 《뺨에 묻은 보석》에서 “좋든 싫든, 우리 모두는 어느 정도 두께의 콩깍지를 통하지 않고서는 참으로 농밀한 사랑스러움과 마주칠 수 없다”라고 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같이 부대끼며 살면서 상처를 입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그런 콩깍지가 필요할 것이다. 또 그 덕분에 우리 인간 사회가 이 만큼 성숙해 왔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다.

이처럼 상대의 정제된 말들이 모두 곧이곧대로 진실이라면 모든 사람이 선하고 그들과의 우정도 영원하고 약속도 어김없이 지켜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술자리에서 입이 마르도록 상대를 추겨세우고 자주 연락하자고 몇 번이나 다짐했건만, 소식 끊은 친구도 있고 이 핑계 저 핑계로 만남을 미루어지는 경우도 많다. 표현된 태도나 말과는 다른 속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나는 실패를 겪고 10년 20년 30년 친구, 이보다 더 오래되고 가까운 친구에게까지 말과 행동에 대한 실망을 경험한 적 있다. 신이 아니고 사람이니까 그럴 것이다. 물론 지금도 나는 사람을 잘 믿는 편이다. 이리저리 선입견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게 잔머리 굴린다거나 비인간적이라는 미안한 마음에 우선은 믿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실패의 원인 대부분은 사람에 있다. 그러므로 사람 ‘믿음’에 특히 민감할 필요가 있다. 이익이 오가는 사업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사람의 무엇을 믿어야 하나? 그의 이력, 지금 하는 말, 글, 태도, 주변, 가진 돈, 권력, 사업규모 등일까? 그의 다른 모든 것보다 그의 행동을 믿는 게 좋다. 그의 행동 앞뒤 정황을 믿는 게 좋다. “사람을 믿지 말고 상황을 믿어라”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6)에서 한재호(설경구)가 한 말이다. ‘상황’과 ‘정황’은 비슷한 말로 쓰이지만 의미의 두께는 다르다. 정황은 행동과 상황이 시간경과로 축적되어 표시된 일련의 콘티 같은 것이다. 상황이 시간의 단면이라면 정황은 여러 개 복수의 ‘상황’을 연결해 놓은 논리회로다. 말에 대한 시작과 결과, 즉 행동의 앞과 뒤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관성을 유지하는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나타내 준다. 그것은 이성의 논리일 수도 감정, 심리의 논리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의 말보다는 상황을, 상황보다는 정황을 볼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눈앞 당장의 판단을 필요로 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그런 긴 사이클과 관찰을 요하는 ‘정황’을 바라보고 기다릴 시간적 여유가 없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먼저 그의 말을 믿고, 그다음 행위의 상황 단면만을 보고 확신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늘 되돌이표 판단의 오류를 반복한다.

선거철만 되면 후보자들은 늘 그랬듯이 번드르르한 공약을 남발하고 웃고 악수하고 사진 찍고 여기서 이 말하고 저기서 저 말하고 당선 후에는 나 몰라라 하는 행동을 반복한다. 그럼에도 후보의 세치 혀 감언이설과 언론의 홍보 전략에 나도 모르게 넘어간다. 대통령, 국회의원 시의원 등 선거를 수없이 치르고 경험했건만 때마다 거짓과 선동은 반복되고, 그들은 매번 속이고 나는 매번 속는다. 그가 나쁜 걸까? 내가 어리석은 걸까? 둘 다일까?

“최 사장! 파산했다면서. 쯧…” 힘든 사정을 뻔히 알면서 말로만 몇 마디하고는 바로 어제 치른 자기 골프 스코어 자랑에만 열을 올리는 친구는 더는 친구가 아니다. 당신의 몰락을 구경하는 구경꾼 지인일 뿐이다.

“내가 뭐 도와줄 거 없나? 꼭 전화해.” 그 뒤 그가 내 전화를 받지 않거나 핑계를 댄다면 그 말은 거짓이다. 말을 믿지 마라 정황을 믿어라.

글 : 최송목 『사장으로 견딘다는 것』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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