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경제신문=칼럼] 동양 문화에서는 전통적으로 '믿음'과 의리를 유난히 강조한다. 주변 리더들은 흔히 '믿음이 안 가면 아예 쓰지를 말고, 한번 믿었으면 의심하지 마라'라는 말을 즐겨 한다. 이런 믿음과 의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적 관행은 오늘날까지도 훌륭한 조직관리 덕목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같은 사람이라도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하고 움직이는 것이 인간의 마음인지라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는 항상 믿음에 대한 위험 요소도 같이 존재한다. 인간 마음의 불연속적 속성으로 인한 믿음의 ‘함정’이다.

먼저, 특정인에 ‘치중된 믿음’에 대한 함정이다. “金 이사가 우리 회사 실세입니다. 하하... 거의 모든 일은 이 친구가 합니다” 중소기업에 방문할 때면 흔히 사장이 직원을 소개할 때 쓰는 단골 멘트다. 중소기업의 경우 대개는 사장이 전적으로 믿고 맡기는 이런 핵심 인물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딱 그 정도 선에서 멈춰야 한다. 이런 게 도를 넘어서면 직원이 아예 사장을 대신해 버리는 경우가 발생하고 그게 관행으로 굳어지면 사장의 리더십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전문성과 권한 위임의 절차가 어설프게 관리되면 사달이 나는 것이다. 급기야 사장조차도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는 존재로 부상하여 그에 대한 인사권도 행사 못 하고 지시 명령조차도 눈치를 봐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윗사람이 직원을 겁내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한마디로 건강한 조직이 아니다.

시실 사장의 관점에서 특정인만을 신뢰하고 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만큼 편한 것도 없다. 또 한편으로 그보다 더 큰 위험도 없다. 그가 덜 미더워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은 실수할 가능성이 있고 유혹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장이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자체만으로 우쭐해서 하거나 그 믿음을 악용하는 사례도 가끔 있다. 대체로 성격 좋고 착한 사장일수록 이렇게 휘둘리거나 악용될 확률이 높아진다. 여기에다 업무 지식까지 부족하면 회사는 그 직원의 전용 놀이터가 되고 만다.

이런 사람은 믿음을 담보로 자신의 사적인 조직과 영향력을 최대한으로 높인다. 위에서 언급한 金 이사도 처음부터 그런 막강한 힘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장이 믿어주고 일을 맡기고 잘 처리하다 보니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고 전권을 행사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다. 돌쩌귀 하나만 건드리면 넘어지는 사상누각 같은 조직이다. 그러므로 회사에서는 그 어떤 권한도 사장의 지휘권 내에 있어야 한다. 물론 긴급 사안이나 원격지에서 현지 결정 등 권한위임 사항도 포함한다. 이때 사장이 가장 걱정하고 염두에 두어야 하는 사항은 그의 배신에 대비하는 것이다. 소위 플랜B를 준비해 두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방치된 믿음’에 따른 함정이다. 회사나 조직에서 한 업무를 계속하다 보면 숙달되게 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척척 일이 진행된다. 사장 입장에서 보면 일의 속도나 성과에서 엄청난 믿음이 갈 수밖에 없다. 권한 위임으로 인한 자율적 업무처리의 효율성, 수월성(effectiveness), 편의성 때문에 특정 한 사람이 계속 그 일을 담당하게 된 경우다. 하지만, 인간의 속성상 한 업무에 장기간 익숙해지다 보면 자칫 매너리즘과 부패에 빠질 위험성이 있고, 특정인에게 권한이 장기간 독점 부여되면 필연적으로 권한이 커지고 힘이 쏠리게 된다.

자연스럽게 업무 개선이나 혁신과도 거리가 멀어지게 되고, 방만하고 비정상적인 판단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소위 ‘고임 현상’의 부작용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뉴스에 심심찮게 나오는 정치 권력기관의 측근 비리나 권력남용도 그렇고, 중소기업에서 경리, 총무, 경영지원팀의 장기근속으로 인해 생기는 부작용도 모두가 믿음의 시간이 길어지고 관리가 느슨해짐에 따른 방치된 믿음의 결과다.

이에 대한 조치 중 하나가 바로 순환 보직이다. 군인이나 대기업의 임원, 은행 지점장, 사법부의 판사, 검사 등 고위 직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제도다. 특히 대기업 그룹 인사에서는 전공과 무관하게 보직 이동을 시키기도 한다. 업무 효율성보다는 투명성과 부패 방지, 사병화(私兵化) 견제에 더 무게를 둔 조치다.

특히 고위직일수록 강력하게 실천하고 있다. 여기서 강력함이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어느 순간에 전광석화처럼 인사이동 명령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담당 직원을 교체하기 힘들다면 담당 팀장을 교체하여 최소한의 물갈이를 한다. 이도 저도 힘든 경우라면 장기 휴가라도 보내고 대체 인원을 투입하여 실험 기간을 가진다. 1년에 한 번씩 강제 휴가를 통한 ‘안전 실험’을 하는 것이다.

다만, 잦은 인사이동이나 보직 변경은 조직 충성도를 약화하기도 한다. 특히 하위직, 전문직일 경우가 그렇다. 그래서 기업의 연구 과제를 담당하는 연구소에서는 장기 근속제, 군에서 부사관의 연고지 복무제가 이런 특성을 염두에 둔 조치라 볼 수 있다. 별문제가 없는 한 그대로 두고 전문성을 살리는 것이다.

세 번째는 인간성과 능력에 대한 동격화로 인한 ‘믿음의 착시’다. 인간성이 좋은 것과 능력이 탁월한 것과는 분명 별개다. 그런데도 리더들은 가끔 이를 혼동하고 일체화함으로써 화를 부른다.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람 됨됨이 인격이 먼저다. 그다음이 능력이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일을 맡길 수 있다는 말이다. 맞는 말이고 가장 이상적인 선택이다.

그러나 자선단체라면 모를까 사업에서 본질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인간성보다는 일하는 능력이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사업 현장에서 많은 경우 인격과 능력을 두루 갖춘 이상적인 인재 구하기에만 매달릴 만큼 한가롭지 않다. 그래서 인격 따로 능력 따로 사람을 쓰게 되는 것이다. ‘믿음의 혼동’이 발생하는 출발점이다.

사람이 좋아 고용했는데 이 일 저 일 시키다 보니 너무 잘한다거나, 인간적인 믿음은 별로 가지 않지만 일은 잘하는 경우다. 그리해서 생긴 믿음은 점점 더 그 믿음이 공고히 되고 확대되다가 급기야 그를 전지전능의 ‘전인화(全人化)’까지 이르게 된다. 그의 인격과 능력을 뭉뚱그려 그가 하는 일이라면 “콩으로 팥죽을 쑨다.” 해도 전적으로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

종합하면, 조직은 ‘믿음’을 근간으로 해야 하지만, 그 믿음은 관리를 통한 ‘필터링 된 믿음’이어야 한다. 직원을 믿고 일을 맡겨야 하지만 그가 하는 일의 과정이나 결과는 비대칭일 수 있다는 전제다. 사람을 사람으로만 보라는 것이다. 사람은 컴퓨터가 아니므로 완벽할 수 없으며 평소 선(善)한 사람도 가끔은 악(惡)하게 행동할 수도 있으며, 강한 사람도 때로는 갈대와 같이 연약해질 수 있고, 탁월한 능력자도 가끔 실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잘 다듬어진 믿음만이 현실적 믿음이다. 믿고 맡기되 그가 하는 일에 관심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직원들에 대한 믿음을 관리 차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단, 리더의 이런 의중을 절대 밖으로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만약 문제가 생기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으로 힘을 보태고 티를 내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누군가가 나를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힘을 발휘하지만, 반대로 의심받고 있다고 의식하는 순간 맥이 풀리고 만다. 믿음은 드러내고, 의심은 꽁꽁 감추어야 한다. 이것이 믿음의 함정을 피해 가는 리더의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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