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경제신문 조건섭 칼럼] 고사성어 호접지몽(胡蝶之夢)이 있다. 장자가 어느 날 꿈을 꾸었다. 꿈에 나비가 되어 허공에 훨훨 날아다니다가 갑자기 깨어나 놀라서 보니 자신이 꿈속에서 나비가 되어 있었다. 그때 장자는 꿈에 내가 나비가 된 것인가, 나비가 내가 된 것인가? 장자는 의문점을 갖고 철학적 사유를 하기 시작했다. 이는 물아(物我)의 구별을 잊은 상태로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무아지경의 상태가 아닐까? 자연과 내가 하나 되는 것 즉 물아일체(物我一體)는 중국 사상가 장자가 주장한 개념으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호접지몽(胡蝶之夢)처럼 내가 고객과 하나가 된다면 내가 고객이 되어 내 가게에서 상품을 구매하면서 경험하는 모든 것을 고객의 눈으로 보고 고객의 마음까지 잘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화성인 고객과 금성인 직원이 마주하는 최일선 접점에서 우리는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을 자주 강조한다.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는 의미다. 우리에게는 아주 의미있는 좋은 말이긴 하나 실제 현장에서는 실천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일전에 큰 병원에 가서 진료접수를 했는데 접수대 벽면에 역지사지라는 큰 글자가 부착되어 있었다. 방문들을 응대하는 직원 한 사람 한 사람 응대 태도를 관찰해보니 그 글자는 한낱 장식품이 지나지 않았다. 그들 스스로 고자세로 무의식적 갑질을 하고 있었다. 직원 스스로가 근무 시작 전 매일 역지사지의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자기 최면을 걸어야 한다. 자신이 상대방과 같은 공동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상대의 마음을 읽고 그 입장을 헤아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따라서 필자는 역지사지란 말보다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을 더 강조하고자 한다. 동병상련의 뜻은 '과부의 설움은 과부가 안다'는 속담처럼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 동정한다는 말이다. 나 스스로 같은 경험을 통해서만 진정한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공감을 더 많이 한다는 뜻일 것이다. 가슴으로 이해하지 않고 입으로만 떠들고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은 진정한 역지사지가 아니다.

시인도 시를 한편 쓰기 위해서는 물아일체가 되지 않으면 시작활동을 하는 것이 어렵다. 신문사의 한 기자가 세상을 달리 하신 시인의 부인을 찾아가 인터뷰한 내용이 있었다. “시인께서 시를 쓰실 때 평소의 모습은 어땠나요?” 그러자 부인께서는 남편은 시를 한 편 쓸 때마다 아주 지랄했다고 말했단다.

여기서 말하는 지랄했다는 표현은 자연물과 내 자아가 하나되는 대상에 완전한 몰입의 경지에 들어가려는 노력의 고통이 아닐까? 그 몰입의 경지에 이르러 급기야 이 세상에 짧은 시한편을 쏟아낸 것 아닐까? 자신의 시를 읽는 많은 독자들의 공감과 감동을 이끌어 내고 평생의 시한편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요즘 경기가 나빠서 장사가 안된다고 아우성이다. 과연 그럴까? 장사가 잘되는 가게도 많다. 그들의 비결은 무엇일까? 고객과 하나된 혼연일체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진정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보인다. 이의 실천 방법으로는 장사가 안 되는 가게, 장사가 어느 정도 되는 가게, 장사가 전혀 안 되는 가게를 내가 직접 방문해서 먹어보고 서비스를 경험해 보는 것이다. 그 식당에서는 고객에게 어떻게 서비스를 하는지 아주 세심하게 관찰해보고 무엇이 좋고 배울만한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고객의 입장에서 꼼꼼히 체크해가면서 분석해봐야 한다. 그런 노력 하나없이 내 가게에서만 고객을 응대하면서 고객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은 역지사지가 아니라 온갖 추측으로 자기중심성의 사고만 더 키워갈 뿐이다. 진정한 역지사지의 마음일 때 고객을 더 많이 알고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으며 훨씬 더 큰 배려를 할 수 있다. 고객에 대해 어떤 관점에서 어떤 배려심을 갖느냐에 따라 고객과의 관계가 이루어지고 고객을 또 오게 하는 단초 역할을 한다. 점주가 내 상품을 판매만 하려고 한다면 고객 입장에서 상품은 넘쳐난다. 상품을 매개체로 고객과 일심동체의 마음이 되고 끌림이 있을 때 고객은 다시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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